정말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올해 초만 해도 SUV를 굳이 왜 사냐며,
나는 애도 나중에 하나만 낳을거고
세단으로도 거의 모든 일을 해치울 수 있다고 주장하던
SUV 열풍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이었고
골수 세단파라고 해도 될 인간이었는데
이제 와서 디펜더가 갖고싶어 타보기까지 한 판국이니
아주 이상한 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화려한 조명을 왕창 받으며 등장한 이 랜드로버의 구원투수는
등장과 동시에 온갖 상들을 휩쓸며 인기몰이 중인데
탑기어에서 시원하게 카 오브더 이어로 디펜더를 선정했지만
이건 영국산 차량이고 탑기어는 영국 매체이니
어느정도 국뽕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만
저 멀리 양놈들마저도 모터트렌드 SUV 오브 더 이어로 선정하여
화제성 하나만큼은 정말 대단한 차로 자리매김했다.
이렇게 주목을 많이 받는 차라서 관심이 간 건 아니고
처음에는 디펜더라는 이름이 갖는 오랜 역사와 정통 오프로더 이미지와 맞지않게
바디-온-프레임 방식이 아니라 모노코크 방식을 쓴대서 별 흥미를 못 느끼다가
완전히 까만색을 칠한 디펜더 테스트카 사진을 보더니만
홀라당 빠져서 갑자기 디펜더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견적까지 짜보고
예상보다 높은 가격에 약간 놀랐지만
잘만 팔린다면 재정위기에서 계속 허우적거리는
재규어랜드로버를 살릴 큰 한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래서 그를 받쳐줄만큼 차가 잘 나왔나 싶어서,
그리고 디펜더가 갖고싶었어서 타보러 갔다.
이 차를 타면서 내가 확인할 내용은 세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정말 랜드로버를 살려낼 만큼 차가 괜찮은가
두 번째는 모노코크 방식으로 바꿀만큼 모노코크의 강점이 부각되는가
마지막은 내 맘에 들었던 첫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이다만, 차를 실물로 본 첫 인상부터가 이미 1번 항목은
합격점을 주고 말았다. 내가 나이든 취향은 아니지만 요즘
중년 아저씨들이 좋다하는 G-바겐 같은 차량에 부쩍 관심이 가는데
디펜더 역시 실물이 사진보다 더 당당하고 존재감이 넘친다.
난 사진으로 볼 땐 후면 디자인이 좀 별로라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테일램프도 생각만큼 작진 않았고
폭도 넓고 두루 정통파 SUV같은 느낌이 많이 난다.
국내에 우선적으로 들어온건 110 D240 모델.
네이밍에서부터 디펜더의 전통을 착실히 따른다.
3도어 모델은 90, 5도어 모델은 110이라는 서브네임을 갖는데
80년대의 디펜더에서 그대로 가져온 이름이다.
그 당시 디펜더의 휠베이스를 인치 수로 표기한 건데
지금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전통을 강조하기 위해 붙인 듯.
D240 모델은 인제니움 4기통 트윈터보 디젤을 얹는데
덩치와 무게에 비해 모자라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스펙표를 보면서 들 법 하다. 그건 좀 이따 확인하기로.
영국 현지에는 신형 인제니움 6기통 디젤이
D200(?)/D250/D300 세 가지 모델로 나왔기에
D250 모델이 나중엔 수입되지 않을까 싶긴 하다만
또 차의 주 구매층들이 자동차세 비싼걸 워낙 싫어하시는 분들이라
D240과 D300(2021 상반기 내 출시예정) 두 가지 모델로
갈 확률도 꽤 될 것 같기는 하다.
차주가 아니기에 본격 오프로드를 뛰어볼 순 없지만
실질적으로 디펜더가 거의 90% 이상의 시간을 보내게 될
온로드 상황에서 어떤지 타보았다.
실내에 오르자 두 가지 의미에서 감탄이 나왔는데
첫 번째는 정통파 오프로더 치고는 인테리어가 꽤 괜찮아서.
하지만 그 다음은 실질적으로 소재나 구성이 차값 대비 좀 부족한데
'오프로더'라는 명목으로 이만큼이나 받아쳐먹는구나 하는 감탄.
보는 시각에 따라 디펜더의 인테리어는 천차만별이겠지만
나는 디자인 자체는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휘황찬란하고 고급스럽고 가죽 도배한 실내를 최고로 침에도
크게 부족하다거나 너무 투박하다거나 하진 않았다.
시트 포지션은 최저로 내려도 당연하겠지만 높다.
도로 위의 모든 승용차들을 깔아뭉갤 것 같은 위치다.
근데 또 말도 안되게 높아갖고 'SUV니까 참아야지'
하는 인내를 요하는 건 아니라서 불편하다거나 안 맞진 않았다.
솔직히 차 성격이 성격인만큼 주행성능이 어쩌니 하는거
아무런 의미 없는거 나도 잘 알긴 안다만
굳이 얘기 하려고 글을 적은거니 쓰자면
딱히 인상깊은 면모는 없다시피 했던 것 같다.
전반적으로 차량의 주행감이 큰 배를 운행하는 것 같은데
110 모델은 해외에서도 에어 서스펜션이 기본인걸로 안다.
느낌이 마치 에어 서스펜션에 공기를 110% 주입한 느낌이랄까
차체가 둥실둥실 아스팔트 위로 항해하는것 같은 감각이다만
그렇다고 차량의 움직임이나 고속주행이 불안한 건 아니다.
여러모로 노면에 착 붙어서 가는 느낌(기대도 안함)은 없다.
D240 모델이라 2000cc 디젤 엔진인데,
여지껏 내가 타본 4기통 디젤 엔진 중 초반 토크감이
가장 강력하며 이 큰 덩치도 꽤 무난하게 밀어준다.
사뿐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의외로 실용구간 힘이 좋다.
50km/h 이하에서의 발진이 출력, 덩치 대비 빠르다.
아무래도 험로 탈출을 감안한 셋팅 같은데
그래서인지 시내 통과하며 여유있는 힘에 놀랄 수준이었다.
차의 직각에 가까운 전면 디자인이나 체중 상
고속에서의 가속은 답답하기 딱 직전에서 멈춘 수준이다만
애초에 이 차를 타고 국내 최고 제한속도인 110km/h를
넘길 일이 운행하면서 몇 번 있기나 할까 싶다.
해봤자 오프로더나 패밀리카인데
차의 용도에 맞게 운행하면 전혀 부족함 없다.
좀 더 넉넉한 파워를 원하면 D300을 기다려보는것도 방법.
기존의 V6 디젤 엔진이 아니라 완전 신형이다.
벨라 페이스리프트에도 탑재가 되는데
어째서 벨라 페이스리프트는 내년에도 도입계획이 없단다.
디펜더로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을 듯.
다른 랜드로버 모델처럼 ZF에서 가져온 8단 자동변속기는
그럭저럭 괜찮은 성능이다.
차의 성격상 당연히 변속이 빠르진 않은데
충실하게 제 역할을 해낸다. 이만하면 됐다.
바디-온-프레임 방식이 아닌 모노코크 방식 섀시를 채택했는데
이는 기존의 디펜더와는 완전히 다른 행보이다.
내가 기존 디펜더를 운행해본적이 없고 신형 디펜더로
오프로드에 들어간 게 아닌 상태에서 속단하는 것 같지만
솔직히 이야기해서 모노코크로 방향을 돌린 것은
실보다 득이 훨씬 많은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디펜더의 고객들이 극악 난이도의 험지를
뒷마당처럼 맨날 드나들지 않을 것이기도 하고
진심으로 오프로드 뛸거면 랜드크루저 사야지
잠재 고객들은 디펜더의 뉴트로 스타일링과
오프로드 주파가 가능하다는걸 앎으로서 느끼는 든든함(?)
을 보고 디펜더를 사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바디-온-프레임 방식을 채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펜더의 오프로딩 성능은 꽤나 강력한데
에어 서스펜션 적용 및 오프로드 모드 활성화 시
38도의 접근각과 40도의 이탈각을 가지며
최대 45도의 각도를 등판 가능,
최대 900mm 수심까지 도하 가능하다.
이정도면 오프로드 최강자로 불리우는
메르세데스-벤츠의 G-바겐보다도 제원 상으론 한 수 위이다.
물론 실 테스트 결과는 G-바겐이 여전히 우위에 서지만
디펜더의 수치들은 모노코크 타입이라고
타협보지 않은 성능을 자랑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바디-온-프레임 방식의 또 다른 장점은 견인 능력인데
디펜더는 이 부분 역시도 타협하지 않았다.
디펜더는 심장 종류에 따라 견인 능력이 상이한데
국내 도입된 D240 모델은 최대 3500kg까지 견인 가능하다.
곧 도입될 D300 I6 디젤 모델 역시 동일하며
가솔린 V6 슈퍼차저 모델(국내 미도입)은 3720kg까지 가능.
오프로드 성능에서는 막강한 능력과
'오프로더 명가 랜드로버'란 타이틀을 유지했는데
모노코크 방식이라 바디-온-프레임 차량 특유의 승차감 저하가 없다.
바디-온-프레임 방식은 요철을 만나면 그 특유의 퉁탕 하는 충격 전달이 있는데
모노코크 방식을 채택한지라 여유롭게 요철을 밟고 넘어간다.
다만 에어 서스펜션에 모노코크 섀시까지 동원한 것 치고
승차감이 어마무시하게 좋아진 편은 아니니 이건 확실하게 해 두길.
메르세데스-벤츠의 G-바겐은 바디-온-프레임 구조에 코일 서스펜션 쓰고도
탁월한 주행성과 압도적인 오프로드 탈출 능력을 둘 다 잡았다.
가격대가 다르다고? 쉐보레가 작년에 국내에 내놓은 콜로라도 역시
동일하게 바디-온-프레임 방식에 일반 스프링 서스펜션이지만
상당히 좋은 승차감을 자랑하는데 디펜더의 반 값이다.
디펜더가 두 배 값인 만큼 승차감이 두 배 더 좋은게 아니니
승차감이 정말로 뛰어난 랜드로버의 역작이라고 하긴 어렵다.
나는 멀미를 절대 안하는 타입인데
사람에 따라 타면 - 특히 뒷좌석 - 멀미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희한하게 이 차만 그런건지 브레이크 페달이 굉장히 예민했는데
움찔움찔 살짝만 발을 올려도 차가 다급하게 멈추려고 했다.
이건 좀 이상했다.
의외로 핸들 직결감이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고,
핸들은 차 사이즈에 맞게 꽤 크다.
그리고 더더욱 의외로 차가 상당히 조용한데
기온이 지금만큼 낮진 않은 때였지만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에 시승을 했음에도
4기통 디젤, 그것도 오프로더형 SUV인데
정숙성이 좋았다. 물론 한 3년 타면 시끄러워지겠지.
차량의 디자인 자체가 공기저항을 크게 고려하지 않은
직각직각 네모네모한 디자인임에도 이정도로 정숙하면
엔진 자체도 꽤나 조용하고 방음도 잘 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방음 괜찮은 디펜더에서 듣는 메레디안 오디오도
꽤나 성능이 괜찮았다. 동 가격대 독일차보다 확실히 낫다.
특히 BMW의 형편없는 하만카돈보다.
디펜더가 내세우는 또 다른 강점은
이번엔 드디어 LG와 공동개발한 새로운 전장이 들어갔다는 건데
랜드로버가 서비스센터에 맨날 들어가는건 이제 글로벌한 밈일 정도로
현재 랜드로버의 차량 신뢰성은 바닥에 추락해있는 상태이다.
조금 지나야 결과를 알 수 있겠지만, 새로 개발했다고 하니
어느정도 기대를 해 보며 이거 탑재된 벨라 페이스리프트가 얼른 보고싶다.
그와 동시에 국내용 모델에는 SK의 티맵이 순정 내비게이션으로 들어간다.
티맵이 요즘 길안내를 막장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허접한 수입차 기본 내비게이션보다야 나을 것이 뻔하니
순정 내비게이션 사용하는 다수의 오너들이 환영할 변화점.
또한 그 티맵 데이터를 불러와서 계기판에 뿌려주는
풀 디지털 클러스터도 좋고 나는 관심없는 최신 ADAS 기능도 대부분 갖췄다.
실내 온도 조절 다이얼에 오만 가지 역할을 부여해놓고
옆에 있는 버튼을 누름에 따라 기능을 달리하는 이 인터페이스는
거지같은 S링크에도 익숙해진 나마저도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확실히 이런건 규모가 큰 제조사가 잘 한다.
그래서 처음에 생각했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
랜드로버를 살려낼만큼 차가 괜찮은가?
괜찮지만, 랜드로버의 구세주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레인지로버 시리즈를 넘어서는 완벽 오프로더 성향 치고는
비록 디펜더가 더 싸다지만, 구식 방식을 채택한 G-바겐보다
오프로드 능력에서 열세를 보이며 주행성능과 주행질감도.
레인지로버 시리즈가 아닌 이런 니치-마켓용 제품은
다 잘할 필요 없이 한 가지만 확실하게 잘 해도 되는데
아쉽게도 디펜더는 온로드와 오프로드 둘 다
완벽하게 잘 한다고는 말을 못 할 것 같다.
디펜더 이미지에 맞게 나오려면 G-바겐 정돈 꺾어야 하지 않나
실내 품질이나 주행 성능, 브랜드 밸류까지 모든 면에서 열세인 디펜더가
최후의 보루마저 메르세데스-벤츠에게 내준듯한 느낌이다.
모노코크로 노선을 갈아탄 만큼 그 장점은 다행히도 다 챙겨왔다.
앞서 설명한대로 바디-온-프레임 특유의 불쾌한 진동 처리도 없고
두루 괜찮은 승차감을 보여준다. 탁월하진 않지만.
주행 성능 역시 바디-온-프레임 방식 차량보다 대개 낫다.
브롱코가 없었다면 디펜더가 북미에서도 꽤 인기를 끌 것으로 짐작했을 거다.
마지막으로 이 차에 대한 나의 관심이 계속 될 건가는
디펜더가 랜드로버를 과연 정말 살려낼까에 대해서만 지켜볼 것 같고
아쉽게도 차량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은 시승 후에 많이 멀어졌다.
일단 이런 차종이 나한테 별로 맞지 않다는걸 깨달았거니와
비슷한 가격의 GLE300d가 내겐 훨씬 만족스런 선택일 것 같다.
GLE300d도 에어매틱 기본 적용에 압도적인 주행성능과 승차감,
그리고 적정 수준의 험로 탈출도 가능하기 때문에 두루 밸런스가 좋다.
이런 차량이 취향인 경우에야 디펜더 구입을 전혀 말리지 않겠다만,
그렇지 않은 소비자의 경우는 같은 브랜드 내에서는 벨라를
타사로 눈을 돌리면 GLE, 3열이 필요하다면 Q7, 성능 생각하면 카이엔이
보다 보편적인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선택이라고 볼 수 있겠다.
2열이 좁아빠지고 승차감 나쁜 X5는 굳이 고려할 필요 없고.
애시당초 불차를 큰거 한 장 할인없이 산다는게 말이 되나
산다면 말리진 않을정도로 차의 수준은 기대이상인데,
굳이 사라고 추천할 차는 아닌 것 같다.
뭇 소수를 타게팅한 차들이 다 그렇다지만,
디펜더는 선택지에서 조금 더 구석으로 밀려 있을 것 같다.
디펜더가 자리한 가격대는 현재 그 어떤 경쟁차종과도 겹치지 않는 곳이다.
더 허접한 지프는 5천만원대부터 시작하여 훨씬 저렴하고,
국내에는 G350d나 G400d가 나온다는 소문만 돈 채로 인증조차 통과하지 않아서
2억원이 훌쩍 넘는 G63 AMG만 판매 중이라 이 역시도 가격대가 다르다.
추후 디펜더 D300 모델이 나오더라도 맞수가 없는 상태는 유지될 듯.
현재 코로나19 여파로 생산이 지연되여 디펜더는 2021년에도
입항이 극소량(350대 남짓)에 그칠 예정이라는데,
다음 입항은 2021년 7월이라니 갖고 싶다면 얼른 계약서부터 써라.
Style-over-substance는 아닌데, 확실히 Style이 가진 임팩트가 크다.
디펜더의 진가는 정말 하드한 오프로더 아니면 알아보기 힘들 것 같다.
기대 이상이지만 내 취향은 아닌 이 차.
취향에 맞아서 산다면 후회는 안할 것 같다.
약간 영국산 쌍용차 같다.
맞는 사람은 잘 타는데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면 저 투박한걸 왜 사? 싶은.
랜드로버를 살려낼 구원투수 역할을 맡아 등장한 디펜더의 어깨가 무겁다.
하지만 디펜더는 꽤나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데
JLR(재규어랜드로버)의 2020년 3분기 판매량이 50%나 수직 상승했고
코로나19로 인한 생산지연에도 불구하고 디펜더가 그 역할을 온전히 담당했다.
정말 완벽한 구원투수까지는 못 되나,
출시 초기인 지금까지로선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평균자책점 3점 정도로 봐주는게 딱 맞을 것 같다.
랜드로버의 앞날에 예상대로 한 줄기 빛이 비추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