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세데스-벤츠에게 'SL'이라는 이름은 특별하다.
'Super Leicht'라는 뜻의 약자로
'초경량'이라고 이름에서부터 이미 못을 박는다.
이름부터 엄청나게 가볍다고 말하는 이 차는
레이싱 혈통을 그대로 간직한 전설적인 모델.
SL이라는 이름의 시초였던 300SL은
원래 일반 판매용 모델이 아니었고,
밀레 밀리아 참가용 차량을 개조 후 1천대 정도 만들어
2차 대전 후 재력이 늘어난 미국인들에게 팔려는
특수 목적을 가졌던 모델로 세상에 등장했다.
실제로는 쿠페와 로드스터 합 3258대가 제작됐지만.
이 300SL이 기반으로 삼았던 레이싱용 차량은
1952년 화려한 데뷔전을 치르면서
당시 최신이었던 콜롬보 3.0L V12 엔진을 얹은
페라리를 한방에 눌러버렸다.
300SL은 첫 데뷔 레이스에서 1,2,4위를 차지하고
2주 뒤 치러진 그랑프리에서도 1,2,3위를 달성,
단숨에 정상의 차리를 차지해버렸다.
이는 2014년부터 지금까지 내리
F1 컨스트럭터 챔피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오늘날의 메르세데스와 똑 닮았다.
그런 메르세데스-벤츠에서 'SL' 이름을 쓰는
완전히 새로운 차량이 갓 공개되었다.
이제는 메르세데스-벤츠가 아닌
메르세데스-AMG 출신으로,
개발의 전권이 AMG 디비전으로 넘어갔다.
SL이라는 이름의 특별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수긍할만한 자연스러운 변화.
실제로 메르세데스에서도'The Star is Reborn'이라며
전설적인 300SL의 계보를 잇는 모델임을
아예 대놓고 홍보하고 있다.
이 차량은 그간의 메르세데스-벤츠 역사에 대한
오마주이자 그에 보내는 찬사 같은 모델인데
일단 모델 레인지가 딱 두 개 뿐이다.
SL 55 4Matic+와 SL 63 4Matic+.
300SL도 212마력(쿠페) / 240마력(로드스터)
두 가지 모델로 출시되었던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현재 AMG 라인업은
35 / 43 / 45(s) / 53 / 63(s) / 63 S E-퍼포먼스
이렇게 6가지인데
사라졌던 55 AMG 네이밍을 되살려냈다.
기존의 55 AMG 모델들은
5439cc V8(M113), 5461cc V8(M152)나
슈퍼차저를 얹은 엔진(M113K)이 올라갔는데
이제는 메르세데스-AMG 차종 대부분에 올라가는
M177 3982cc 트윈 터보 V8이 얹힌다.
스티브 잡스가 타던 걸로 유명한
SL 55 AMG가 사라졌다 다시 살아난 것.
돈에 미쳐 잡스의 DNA가 아예 사라진 애플과 대조적
새 SL의 역사책 들여다보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외장 디자인은 최신 메르세데스-벤츠의
스타일링 큐를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내장은 300SL의 그것을 많이 따온 느낌이 강하다.
자사의 깊은 헤리티지를 강조하길 좋아하는
메르세데스-벤츠 답게 이를 잘 녹여놓았는데
300SL 대시보드에 자리하던
원형 다이얼들을 모티브로 따온
터빈 형상 원형 송풍구와
가로로 넓게 펼쳐진 대시보드 형상 등.
그러면서도 이미 S-클래스에서 보았던
최신 11.9인치 MBUX 인포테인먼트 시스템도
위화감 없이 스며들게 디자인되었다.
메르세데스-벤츠가 정말 무서운 회사임을
인테리어 디자인에서 항상 보게 되는데
얘네들은 최고, 최신의 진보된 기술을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아날로그틱한 스타일 속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잘 녹여낸다.
40년 전 처음 등장했던 SL(R107) 이후로
오래간만에 2+2 구성으로 돌아온 것 역시
메르세데스-벤츠의 황금기를 돌아보게 한다.
R107 SL '파고다'는 클래식 벤츠 매니아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메르세데스-벤츠'로 종종 꼽히는 모델.
외관 디자인부터 살펴보면
신형 S-클래스(W223)의 디자인 큐가
여기저기 많이 녹아있는데, 특히 테일램프가 그렇다.
정식 공개 이전 유출된 사진을 봤을 땐
차가 생각보다 낮고 왜소해보였는데,
공식 사진을 보니 역시 메르세데스-벤츠답다.
정면에서 바라볼 때 부풀어오른 앞 휀더는 물론
낮고 넓게, 그리고 사납게 펼쳐진 마스크가
대번에 이 차량의 성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F1에서 몇 년째 왕관을 내려놓지 않고 있는
팀 메르세데스 답게 여기서 배운 노하우도
신형 SL에 대거 투입되었다.
앞범퍼의 윙과 차체 하부의 플랩,
브레이크 냉각을 위한 덕트까지 모두
최고의 냉각 효율과 최소의 공기저항을 위해
제 역할을 다 하도록 설계되었다.
흔히들 SL이라고 하면 스포츠카보다는
대륙 간 탄도미사일같은 GT카를 떠올리는데,
메르세데스-AMG가 이렇게 개발했다는 것을 봐선
이번에는 완전히 스포츠카로 개발한 듯 하다.
이게 상당히 영리하면서도 당연한 전략인 것이,
현재 메르세데스-AMG GT가 풀 체인지를 앞둔 시점이고
메르세데스-벤츠는 AMG GT로 포르쉐 911에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바 있다.
'스포츠카'라는 단어는 너무 광범위해서
특별히 어떤 차를 상징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2도어 스포츠카 하면 떠오를 법한 모델은
단연 911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는.
메르세데스-벤츠가 AMG GT로
그간 '타도 911'을 외치던 그 어떤 차 보다
911에 가까이 붙었고 접전을 펼쳤지만
이를 압도하지는 못했는데,
그래서 차세대 AMG GT는 현행보다도
더욱 하드코어한 셋업으로 출시될 확률이 높다.
비교적 주행 성능이 쿠페보다 덜 강조되는
카브리올레 역시도 이런 흐름을 무시하긴 힘들어
R129 - R230 - R231 모델을 거치며 쌓아둔
명실상부 최고의 장거리 크루저 이미지를
메르세데스-벤츠이니 완전히 놓치지는 않겠지만,
이번에는 거의 대놓고 스포츠카로 재 포지셔닝한 것.
심지어 이름도 'SL'.
그리고 이 차량이 가지게 될 가격대 역시
SL이 어떤 차로 나올 지에 대한 힌트를 주는데,
SL 55 4Matic+과 SL 63 4Matic+이 경쟁하는
한화 2억원 ~ 3억원 사이 컨버터블은
벤틀리 컨티넨탈 GTC와 포르쉐 911 카레라 S 카브리올레,
애스턴마틴 밴티지 로드스터와 재규어 F-타입 R 등
메르세데스-벤츠 입장에서는
'뱃지값'이 한 층 더 높은 모델과 경쟁해야 한다.
S-클래스 컨버터블(A217)은 최고의 주행성능과 호화로움을
비교적 안정적인 독일산 패키징 안에 담아냈지만
판매량 측면에서 성공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럭셔리함, 호화로움은 이 급에서
벤틀리와 마세라티, 애스턴마틴을 이기기 어려운데
제아무리 차급 대비 높은 브랜드 밸류 평가를 받는
메르세데스-벤츠도 이들과의 경쟁은 벅찼던 것.
결국 남은 한 가지 선택은
아예 완전히 스포츠성을 부각하는 것인데
이는 이미 AMG GT로도 지향했던 바 이면서
비교적 럭셔리함이 덜 갖춰지더라도
구매층들이 용서를 해줄 확률이 높다.
아무리 비싸도 '좀 빡세게 달리는' 차라면
오만 데 가죽과 금속을 바를 필요는 없다고들
대부분 생각하니까.
그래서 AMG GT C 로드스터와
S-클래스 카브리올레, 8년차에 접어든 SL(R231)을
한방에 대체할 모델로 메르세데스-AMG SL이 탄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편안히 앉아
표지판 백몇 개를 뒤로 보내는 일은
SL의 탁월한 장기 중 하나일 것이 확실하다.
고속에서의 안정감은 명실상부 메르세데스-벤츠니까.
이번에는 사륜구동을 전 모델에 기본화한 것도 있다.
AMG GT C 로드스터를 대체하는데
웬 사륜구동인가 싶겠지만,
이제 이런 모델들에도 사륜 구동 선호도가 상승 중.
단적인 예로 국내의 포르쉐 911 판매 비중을 보면
'스포츠카를 사는데 무슨 사륜구동?' 싶겠지만
카레라 4/카레라 4S의 비중이 2/2S보다 훨씬 높다.
시장 흐름에 맞춰 SL도 모델 최초로 사륜구동.
하지만 메르세데스-AMG 디비전은
최근 전 모델에 사륜구동을 도입하며
단 한번도 다이내믹함이나 스릴을 놓치지 않았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메르세데스-AMG SL은 한 가지 엔진만 얹힌다.
바로 M177 3982cc 트윈 터보 V8.
이미 오랜 시간동안 봐왔던 검증된 유닛으로
실린더 V뱅크 사이에 트윈 터보를 올린
Hot-vee 기술을 비롯해 터보랙과의 전쟁을 치른 엔진.
SL 55 4Matic+는 해당 엔진으로 469마력,
SL 63 4Matic+는 577마력을 발휘하여
각각 AMG GT와 GT R과 동일한 출력이다.
'SL 55'라는 이름은 상징성이 다분한데
메르세데스-벤츠 SL 55 AMG가 첫 등장할 당시에는
250km/h에서 개입하는 전자식 제한장치를 해제하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컨버터블이었던 화려한 역사가 있다.
5439cc나 되는 거대한 엔진에 슈퍼차저까지 붙여
200mph(320km/h) 장벽도 뛰어넘는 은색 총알.
이제 이는 훨씬 작고 환경친화적인 엔진을 얹고
동일한 최대출력과 토크 수치를 선보이니
기술의 진보가 새삼 눈부시다.
터보 엔진으로 바뀌면서
시원한 비명을 지르던 자연흡기 플랫식스가
사라지고 승용차같은 소리를 내는 911(992)과 달리
이 차는 AMG. 사운드 하나는 기대해도 좋다.
SL 63 4Matic+는 출력이 577마력이나 되는데,
동일 출력의 트랙 헌정 AMG GT R의 지붕을 벗긴
AMG GT R 로드스터가 750대 한정판이었던 걸 생각하면
실로 대단한 수치라고 할 수 있다.
주 경쟁 차종인 911 카레라 GTS 카브리올레보다는
87마력이나 높은 것이며,
동일한 엔진의 애스턴마틴 밴티지보다도
74마력 가량 더 높다.
AMG 스피드시프트 MCT 9G 변속기와 맞물려,
새롭게 탑재된 사륜구동의 도움을 받아
SL 63 4Matic+는 0-100km/h를 3.6초만에 도달한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인 것은,
AMG GT C 로드스터를 대체할 모델인데
M178(드라이 섬프 윤활 방식)이 아닌
M177(웻 섬프 윤활 방식)이 장착되었다는 점이다.
낮은 무게중심을 위해 AMG GT 시리즈는
전 모델 M178(혹은 M178 LS2)을 사용하는데
SL은 보다 넓은 대중을 겨냥해서인지
M177을 그대로 얹고 등장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AMG 측도 이를 의식했는지
SL에 얹히는 M177은 오일 팬 위치가 다르단다.
드라이 섬프 방식의 단점 중 하나가
무게 증가인데, 'Super Leicht' 이름값에 맞게
그냥 웻 섬프 방식을 쓰고, 오일 팬 위치를 더 낮춰
무게중심 손해를 상쇄하는 방향으로 가는 듯 하다.
그밖의 엔진 내 변경점이라면
인터쿨러의 위치 변경, 가변 크랭크케이스 냉각 도입,
흡기와 배기 시스템 개조가 있다.
완전히 새로운 플랫폼 위에 개발된 SL답게
엔진 역시 코드네임은 동일하지만
손을 상당히 많이 본 유닛이 새로 얹힌다.
변속기는 AMG GT랑 다르게 DCT가 아닌 MCT.
메르세데스-AMG의 변속기 라인업은
TCT(토크컨버터식 자동)과 MCT, DCT로 나뉘는데
지금 그 차이를 여기서 설명하기는 너무 길다만
MCT는 TCT보다는 DCT에 유사한 구조로
토크 컨버터 대신 여러 개의 클러치가 달린 클러치 팩이 달려
DCT와 마찬가지로 오일에 젖은 클러치가 변속을 진행하지만
DCT보다 가볍지만 수동 변속 시 DCT보다 약간 느리다.
마찬가지로 'Super Leicht' 이름에 걸맞게
무게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서 DCT가 아닌 MCT로 온 듯 하다.
AMG GT 시리즈는 AMG SPEEDSHIFT DCT 7G,
새 SL은 AMG SPEEDSHIFT MCT 9G로 단수가 2개 더 많기도.
차체 자체도 AMG GT보다 큰 발전을 이루어서,
차체 전체의 무게가 270kg밖에 나가지 않는다.
알루미늄과 마그네슘, 철과 탄소섬유가 섞인
복합 구조인데 무게는 줄고 차체 강성은 늘었다.
가로 비틀림 강성은 AMG GT 대비 50%,
세로 비틀림 강성은 40%나 증가하여 상당한 개선.
물론 그럼에도 차량 무게가 1970kg이고
일부 외국 댓글을 보니
'초경량(Super Leicht)의 독일식 해석은 2톤인가'
하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솔직히 이 차는 오픈 톱에
사륜구동과 V8 트윈터보 엔진,
그리고 이 모든 호화로운 구성을 다 올린 차 아닌가.
특이하게 신형 SL은 전륜에 5링크 서스펜션이 탑재되는데
우리가 흔히들 '멀티 링크'라고 알고 있는 것의 진보된 형태.
AMG GT는 전륜에 더블 위시본이 탑재되며,
이번에 신형 911 GT3(992)가 전륜에 더블 위시본을 얹어
기존과 완전히 다른 주행감각을 구현했다고 난리인데
SL은 무려 전륜에도 5링크 서스펜션이다.
911 카레라 시리즈는 여전히 전륜에 맥퍼슨 스트럿.
메르세데스-벤츠에 의하면
'신형 SL은 AMG GT의 조종성과 더불어서
새롭게 정제된 승차감과 주행감을 제공'한단다.
심지어 911은 뒤에 엔진이 얹히는데,
SL은 앞이라고 실망할 것 없다.
위의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프런트 미드십 수준으로
엔진이 뒤로 있는 끝까지 밀려 있으며,
전륜 액슬 거의 뒷쪽에 엔진이 위치한다.
전통적인 FR 레이아웃다운 재미는 보장하면서
FMR이라 밸런스는 챙긴 일거양득의 구조.
SL 63 4Matic+는 요즘 유행하는
48V 안티-롤 시스템이 기본으로 장착되고
새로운 경량 서스펜션 구조에 더해
유압으로 댐퍼의 연결을 제어한다.
SL 63 4Matic+는 또 후륜에 전자식 LSD가 달리며
SL 55 4Matic+에서는 LSD가 옵션으로,
AMG 다이나믹 패키지 플러스에 포함.
이를 보면 SL은 사륜구동이지만
매캐한 연기로 뒷 타이어를 지워버리는,
AMG-스타일의 주행 방식도 충분히 가능할 듯.
신형 SL의 인테리어는 위에 적었듯이
클래식한 느낌과 하이테크한 느낌이 공존하는데
메르세데스-벤츠가 135년 역사의 회사답게
운전 중 손쉬운 인포테인먼트 사용을 위해
메인 11.9인치 디스플레이에 틸팅 기능을 넣었다.
12도부터 32도까지 각도를 조정할 수 있으며
메르세데스-벤츠 측은 톱 오픈 시
햇빛 반사에 의한 시인성 저하를 이유로 들었지만
로드스터 특성상 낮게 앉기 때문에
팔이 무진장 긴 사람이 아니라면
벨트를 착용한 상태에서 누르기 힘들 수도 있다.
이것까지 배려한 디자인으로
이는 동일한 센터페시아 형상의
S-클래스에는 없는 기능이다.
여러모로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다운 배려.
메르세데스-벤츠 오픈 톱 차량으로
당연한 구성이겠지만, 에어스카프가 포함이다.
컨버터블 하면 또 메르세데스-벤츠 아니겠는가.
에어스카프와 더불어 매직 스카이 컨트롤 등
오픈 에어링 관련 신기술은
언제나 메르세데스-벤츠 차량에서 봐왔었다.
계기판 역시 300SL의 그것과 유사하게
S-클래스와 동일한 디스플레이형 클러스터지만
S-클래스는 모니터가 그대로 노출됨과 반대로
SL은 주변부가 원형 장식으로 둘러싸여 있다.
누가 헤리티지 빼면 시체인
메르세데스-벤츠 아니랄까봐,
역사와 전통은 절대 잊지 않으면서
거기에 최신 기술을 누구보다 먼저 집어넣는다.
SL은 이름답게 과거와 현재 모두에 충실하다.
역사를 잊은 회사에게 미래는 없다.
또한 존재감이 너무 없어 위에 안 적었지만
경쟁 차종(?)으로 BMW M8 카브리올레가 있다.
불차는 상위 차종으로 돈을 버는 경쟁사가
부러워서 없는 모델을 급조하는 한편
오랜 역사의 메르세데스-벤츠는
아름다운 기억 속의 모델을 다시 불러냈다.
8시리즈가 그란쿠페를 앞세워서
F세그먼트 시장에서 판매량을 강조하긴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나.
오리지널은 어떤 브랜드와 차량인지.
이번 SL은 오랜만에 소프트탑을 탑재했다.
하드탑 컨버터블은 이제 없어지는 추세인데,
다이나믹한 주행질감을 내세우는 SL이라면
따를 수 밖에 없는 유행이다.
하드탑은 접어서 보관할 시
차량 주행질감에 나쁜 영향을 잔뜩 미치는데
유리를 품은 무거운 철판이 한가득 접혀서
낮지도 않은 이상한 위치에
계속 따라다닌다고 생각해보라.
신형 SL이 소프트탑이고,
날렵한 새 인상을 갖추었다고
'SL답지 못하다'는 소리를 한다면
그건 SL이 어떤 모델인지 쥐뿔도 모르는 것.
SL은 태생부터 페라리와 경쟁하는,
레이싱에서의 메르세데스-벤츠가 갖는 헤리티지를
그 어떤 모델보다 강하게 상징하는 특별한 모델인데
스포츠성을 더 추구한다고 해서 SL이 아니다?
무식하면 입을 닫는게 답이다.
우리나라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잠깐 하자면,
SL이 자리하게 될 가격대의 컨버터블 판매량이
어느새 굉장히 늘어난 편이다.
911(992) 카브리올레는 꽤나 흔히 보이며
벤틀리 컨티넨탈 GTC도 도산대로에서는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는 것이 현 상황.
AMG GT와 911의 관계가 그랬듯이,
SL이 등장하면 911의 라이벌이 될 것이다.
SL 55 4Matic+과 출력이 동일한
2021년식(국내) AMG GT가 1억 8260만원.
사실 독일 현지에선 2021년식 AMG GT가
523마력으로 출력이 크게 뛰었는데
국내 수입분은 이래저래 꼬인 상황이기에
469마력 AMG GT 모델을 기준으로 잡자면,
SL 55 4Matic+과 출력이 동일하다.
그렇다면 SL 55 4Matic+의 가격은
이와 대략 유사할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SL은 오픈톱 모델이지만 GT와 달리
전용 모델의 이미지는 아니기에,
두 가지가 서로 상쇄시켜 유사한 가격일 듯.
현재 911 카레라 4 카브리올레가
옵션을 적당히 넣으면 1억 9천만원 정도기에
SL 55 4Matic+도 2억원 미만에 끊지 싶다.
거기에 AMG 다이나믹 패키지 등은 옵션.
반면 SL 63 4Matic+은 출력도 훨씬 높고
(원래 577마력짜리 AMG GT R은 911 GT3RS와 경쟁)
주행성능 관련 옵션도 대거 기본장착이기에
2억 6~7천만원 선이 되지 싶다.
이번에 911 카레라 GTS 시리즈 국내 판매가가
이상하리만큼 비싸게 책정되었기에,
어차피 레이싱 홍 그룹이 똑같이
메르세데스-벤츠나 포르쉐를 국내에 판매하는데
대충 비슷하게 나와서 2억 중반을 넘지 싶다.
근데 이런 적지 않은 금액을 투자해서
차를 구입한다고 생각했을 때
남들과 좀 다른 선택을 해야 할 필요성과
구입하는 제품이 가지는 캐릭터가 중요해지는데
일단 911(992)은 대기가 1년 이상일 정도로
이미 길에 꽤나 깔린 상태임에다
배기음을 듣고 기겁을 할 정도로 소리가 답답한데
SL은 보다 섹시한 몸매와 소리를 갖추고
더 럭셔리하고 진보된 실내까지 가지니
SL을 놔두고 911을 살 이유가 이젠 없어졌다.
만약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주저없이 911을 선택할 것이다.
911만의 특색이 충분히 살아있던 시절이고
특히나 자연흡기 플랫식스는 예술이기에,
911을 놔두고 다른 차를 볼 이유가 없던 때다.
심지어 911은 전방위 시야도 탁월하고
승차감마저도 괜찮아 데일리카로 충분하거든.
근데 지금 와서는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
992 출고한 사람들이 이를 매각하고
박스터 GTS(981)이나 구형 911(997.1/991)로
많이들 간다니, 나도 그 심정 십분 이해한다.
터보를 얹는 것으로도 모자라
환경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GPF(가솔린 미립자필터)까지 달려서 나오는
퍽퍽하기 짝이 없는 소리는 답이 없다.
스포츠카라면 모름지기
운전석에 앉는것 부터 감동이어야 하고
시동을 걸면 엔진과 배기의 하모니에
온몸에 전율이 흘러야 하는데,
이를 만족시켜줄 차 명단에서
911은 탈락하고, SL이 새로 등장한 것.
짜릿함과 특별함을 원하는 이들에게,
이제 911의 시대는 끝났다.
메르세데스-AMG의 신작 SL을 보라.
돈을 지불한 만큼의 특별함을 준다.
그리고 컨버터블의 대표적 특징이라면
내가 볼 때의 근사함도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톱을 연 채로 신호등에 걸려 섰을 때
'남들이 나를 쳐다봤을 때의 모습'이
무엇보다 중요한 차종이다.
벤츠, V8, 컨버터블.
이것만으로도 끝난 조합 아닌가?
세꼭지별이 달린 둥둥거리는 차에
화사한 내장과 대조되는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당신을 상상해 보라.
다른게 혹시 더 필요한지.
돈은 이런 곳에 쓰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