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나이 먹어도 영원히 애라더니
한 살씩 먹어가면서 나도 그 말을 실감하는 중.
남자들의 대표적인 장난감인 자동차 또한
그런 아이스러움을 자극하는, 지극히 비논리적인
특별한 차량들이 나오는 경우가 심심찮은데
테슬라의 신형 모델 X를 타고 난 뒤에
딱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이 들길 거부하는 철부지 남자들을 위한 차.
테슬라가 2023년 전 세계 최다 판매 차량에
모델 Y(약 123만대)를 1등으로 등극시키며 이젠 정말
자동차 업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는데,
테슬라는 원래 고가 라인인 모델 S와 X부터 팔기 시작했고
이 두 모델은 최근 리프레시를 단행해 새 모델이 나왔다.
사람들은 다들 제로백 1.99초의 모델 S 플래드에
죄다 관심이 쏠려 있지만, 내 관심은 좀 다른 곳에.
리프레시된 모델 X 롱 레인지가 정말 궁금했음.
모델 S 플래드도 이미 타보았고,
최근 급격하게 올라온 테슬라 차량들의 주행 완성도와
플래드다운 가속력에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기에
최근 SUV 아니면 구매대상으로 고려하지 않는 내게
모델 X 롱 레인지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모델 X 플래드도 있지만 굳이?의 느낌이 강해서.
궁금하면 당연히 타보는 것이 순서.
그래서 가져왔다. 모델 X 리프레시 롱 레인지.
모델 X 리프레시는 모든 면에서
이전의 모델 X에서 개선을 이루었다.
우선 제원부터.
롱 레인지는 최고출력 500kW(670마력),
최대 토크는 75 kg·m. 구형 모델 X 롱레인지보다
출력은 200마력 정도 올랐는데
최대 토크의 향상 폭은 그리 크지 않다.
다른 말로, 모터의 회전 한계점이 더 높아졌다는 뜻.
제일 엔트리 모델인데 출력이 이 정도라
경쟁 모델로 꼽을만한 BMW iX xDrive50이나
메르세데스-벤츠 EQS SUV 580보다 100마력 이상 높다.
플래드로 가면 1020마력이라 또 다른 세상이지만
모델 X 내에서 기본형 모델임에도
경쟁사들의 상위 모델보다 힘이 세단 건 장점.
남자는 늙으나 젊으나 힘이 센 거 좋아하니까.
배터리는 이전과 동일하게 100kWh로,
이 두 차종(EQS SUV 107.1kWh, iX 105.3kWh)보다는
살짝 작은 배터리팩을 얹고 있다.
한 체급 낮은 마칸 EV가 100kWh 팩을 얹는다니
모델 X의 배터리팩 사이즈가 엄청나게 큰 편은 아닌 것.
그럼에도 환경부 인증 주행가능거리는
EQS SUV 580과 iX xDrive50이 447km으로
타이기록을 낸 것보다 긴 478km.
적게 먹고 더 멀리 가는 건 언제나 환영이지.
전기차는 아직 유지비가 내연기관 차량보다
많이 저렴해서, 내연기관 차량 구입 시
연비를 따지는 것에 비해선 전비를 고려하는 고객이
별로 없는 상태인데 확실히 이 부분에선 테슬라가 앞선다.
특히나 아우디 e-tron 55 quattro같이
전비가 처참해서 95kWh 팩을 얹고도
인증 주행가능거리가 겨우 291km인 차량들도 있는데,
효율을 고려할 때 모델 X 롱레인지와는 거의 두 배 차이.
최근 전기차 충전료가 많이 올라서
이제 이런 큰 차량에선 무시 못할 수준까지 왔는데
슈퍼 차저의 편의성과 운행 비용 절감,
차량이 선보이는 출력을
복합적으로 고려하면, 동력 계통에선
모델 X 롱레인지가 남들을 압도한다.
전기차로 맨날 장거리 뛰는 입장에선
테슬라가 구축해놓은 슈퍼 차저 생태계가 부럽다.
슈퍼 차저가 이제 타사 차량에도 개방되었지만
원래부터 테슬라 차량을 운행해서
바로 도착해서 후진주차 한 다음
전동식으로 열리는 포트에 꽂으면 끝인 것이랑
슈퍼 차저 대응 설계가 되지 않아
충전 포트 위치가 불편한 위치에 있고,
또 테슬라 앱을 깔아서 아이디를 만들어서 가입하고
하는 불편함은 사용자 경험 측면에서 완전히 다르다.
사실상 슈퍼 차저 개방을 통해
'우리는 우리네들 충전기도 남들한테 열어줬다'는
명분도 쌓았으면서, 실제론 기존 고객들의 심기도
거의 건들지 않는 선에서 테슬라가 똑똑한 선택을 한 것.
예나 지금이나 테슬라 차량들의 인테리어는
좋게 포장해줘서 미니멀리즘,
나쁘게 말해서 차량 가격 대비 주는 게 없다.
대시보드 중앙의 17인치 모니터로는
사실상 모든 걸 다 조작할 수 있는데,
이걸로 충전 중 게임을 할 수도 있고
어떤 것을 눌렀을 때 나오는 애니메이션이나
장난스러운 배치는 남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함.
일례로 공조기 조절 패널에 송풍을 작동시키면
바람이 풀풀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나오는데
이런 작은 디테일이 모여 전체적으로 유쾌하다.
이 정도 차량 가격까지 올라오면
대개 보수적인 고객층이 많기 때문에
전통적인 프리미엄/럭셔리 브랜드들은 과감한 시도를
주저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는데, 테슬라는
많이들 알듯이 완전히 다른 노선.
모델 X의 상징과도 같은 팰콘 윙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뒷문이 화려하게 열리는 차를
가지고 싶으면 슈퍼카까진 가야하는데,
슈퍼카의 아무나 넘볼 수 없는 가격도 가격이다만
가족과 함께하며 이런 특징을 가진 차를 타는 것과
슈퍼카에 걸윙, 버터플라이, 시저 도어가 달린것과는
분명 실 생활에서 와닿는 체감이 다르다.
초등학생들에게 그래서 모델 X가 인기 최고.
초등학생같은 정신연령의 아저씨들한테도.
실내 얘기 나온 김에 시트 언급 잠깐 하자면
실리콘 밸리 개발자들 맨날 컴퓨터 앞에 앉아있느라
거북목이 얼마나 심하면 테슬라는 늘 이런 형상의
운전석 시트를 달아놓는지 참 의아하다.
자기네들이 앉아봐도 정말 불편할거같은데
이렇게 아래로 꺾인 형태의 일체형 헤드레스트는
모델 3이나 모델 Y, 모델 S도 다 똑같이 불편했다.
내겐 이래서 테슬라는 장거리 운행하기 힘들다.
오디오는 테슬라답게 좋은 품질이었으나,
저가 라인인 모델 3나 모델 Y가
차량 가격 대비 매우 뛰어난 수준이었던 것에 비해
차량 가격이 거진 두배 이상 올라온 모델 X는
그만큼씩이나 더 좋진 않다.
내가 아직 메르세데스-벤츠 EQS SUV를 안 타봐서
얘네의 부메스터 4D 시스템은 모르겠지만
모델 X가 BMW iX의 Bowers & Wilkins 오디오를
뛰어넘진 못했다. 사실 iX의 이 시스템은 사기에 가까움.
iX Bowers & Wilkins보다 더 좋으려면 롤스로이스 필요함.
의외로 테슬라 차량치고 저음역대가 약간 뭉쳐있고
고음이 시원하게 지르는 느낌이 다소 덜하다.
22스피커, 960W 시스템이라는데
스피커 갯수가 너무 많은 것 대비해서 아주 탁월하게
22개가 전부 맞춤형으로 조율됐단 느낌이 없다.
둥둥 울리는 중저음역대의 펀치력은 센데
극저음이나 중음의 전달은 약간 모자람.
그래도 아우디 e-tron 55 quattro의
Bang & Olufsen 시스템보단 좋고
이제 BMW iX도 xDrive50까진
하만카돈 오디오가 들어가는데, 이 하만카돈보단
모델 X가 한 수 위다. 체면치레는 했음.
그러니까 오디오 신경쓰면 BMW iX M60
전기 SUV가 아니라 비슷한 가격으로 비교하면
마세라티 그레칼레의 소너스 파베르 시스템이
내 귀에는 제일 좋더라고. 전 음역대가 짱짱함.
스냅백 뒤집어쓴 신도시 유부남들이
선호할만한 음색이긴 하니까
어찌보면 모델 X의 오디오는 고객층 맞춤형.
이제 달려볼 차례.
모델 X 리프레시에 기대를 많이 한 이유가
모델 S 리프레시를 타봤더니 굉장히 좋아졌어서다.
테슬라 특유의 느린 댐퍼 반응으로 인해
반복되는 굴곡에 울렁거리는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에어 서스펜션을 채택한 덕분에 노면 잔진동은
많이 억제를 한 편이었고, 스프링과 댐퍼간의
균형을 종전보다 훨씬 잘 맞췄었다.
이전에는 스프링의 단단함을
부드럽고 느리며 긴 스트로크의 댐퍼가
잘 다루지 못하는 느낌이 강했었거든.
특히나 모델 S 플래드는 고성능 버전임에도
평소에 타고다니기 부족함 없는 승차감이었던지라
모델 X도 비슷한 수준으로 좋아지지 않았을까
기대를 했다만,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보다.
일단 이 거대한 22인치 휠이
노면 굴곡을 꽤나 선명하게 전달한다.
에어 스프링이 채택됐음에도.
이제 전자제어식 댐퍼 설정값을
운전자가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데,
편안함과 핸들링 두 가지 옵션을
각각 독립 제어할 수 있다.
제일 부드럽게하고도
핸들링 강화하는 옵션을 선택할 수도 있음.
그럼 차량 스스로가 아주 불편해하고 어색해함.
부드럽게 만들더라도 너무 튀는 느낌.
바디-온-프레임 차량들처럼 포트홀 같은 걸 밟으면
쾅 하는 순간적인 충격이 실내 전체에 전달된다.
단단하게 만들면 아이오닉 5 N의 스포츠 서스펜션 모드처럼
노면이 얼마나 매끄럽지 않은지 일일이 다 알려주고.
난 운전을 해야해서 뒷좌석 승차감 파악을 위해
뒤에 승객을 모셨는데, 탑승자 왈
판때기에다가 바퀴를 달아놓은 느낌이라고.
내가 방금 전에 바디-온-프레임 차량같다 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모델 S 리프레시가 좋아진 것에 비해
모델 X 리프레시는 많이 모자란데,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
모델 S는 현재 직접적으로 매칭되는
경쟁차량이 딱히 없는 상태.
모델 S 플래드는 그와 같은 성능을 내는
독일 전기 세단보다는 반값 수준의 가격이고,
전기 승용차로서의 경쟁 상대들은
그보다 완성도가 못한 차량들이 대부분.
제네시스의 Electrified G80이나
메르세데스-벤츠 EQE, BMW i5까지
전부 한 체급 낮은 차량들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메르세데스-벤츠 EQS보다 나쁘냐 하면
그것도 아니면서 가격은 이들보다 저렴함.
한마디로 종합 패키징이 훌륭하다.
그러면서 테슬라가 가지는 장점들도 그대로 보유했고.
승용차 시장이 다 죽은 탓에 경쟁이 비교적
덜 치열한 것도 어느정도 있다.
문제는 모델 X는 SUV이고,
전기 SUV 시장은 엄청나게 치열하다.
난 이 차가 승차감이나 주행 성능 관련해서
BMW iX보다 나은 점을 단 하나도 찾지 못하겠음.
아직 메르세데스-벤츠 EQS SUV는 타보기 전이지만
이 역시도 비슷한 결론이 나올 게 뻔하다.
심지어 통통 튀는 성향의 아우디 e-tron 55 quattro도
모델 X만큼 승차감이 나쁘진 않았음.
BMW iX는 BMW답게 스스로의 무거운 무게를
어느정도 감쪽같이 숨기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고
시내 주행 시 가속감도 생각보다 가뿐하다.
실제 가속과 가속'감'은 완전 별개의 이야기.
모델 X 롱 레인지는 더 높은 출력을 갖췄지만
iX만큼 톡톡 깔끔하게 나가지 않는다.
물론 풀 악셀을 전개하면 당연히 모델 X 승.
간선도로와 고속도로에서 난폭운전이 하고싶다면
모델 X가 훨씬 좋은 선택이다만, 내겐 iX가 더 좋다.
iX가 사실 너무 잘 나온 차라 누구도 이기기 어렵지만
그래도 테슬라의 괄목할만한 성장에
견줄만한 수준으로는 올라오지 않았을까 기대했었고
모델 X는 아쉽게도 그건 전혀 아님.
정신연령 어린 아저씨들이 악셀 신나게 밟아대며
공도에서 나대기에 모델 X가 좋단 점은
다른 초등학생스러운 차량의 요소와 잘 어울리네.
댐퍼 설정을 전부 단단함-핸들링으로 놓고
차고까지 최저 상태로 낮추더라도
모델 X는 스스로가 큰 차라는 점을
전혀 숨기려 들지 않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역시도 BMW iX와 크게 차이나는 부분.
타이어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피렐리의 스콜피온 제로 올시즌인데,
피렐리 특유의 노면 피드백이 올라와서
이런 패밀리 SUV에는 약간 독이다.
운전대로 전달되는 피드백이 그리 많지도 않고
전반적으로 묘한 설정값.
테스트를 반복하며 전비는
대략 193Wh/km을 기록했음.
우리에게 익숙한 단위로 환산하면
5.18km/kWh. 나쁘지 않은 수치다.
과격한 가속과 운전을 어느정도 포함했으니
살살 타고다니면 180Wh/km 정돈
어렵지 않게 기록할 수 있을 듯.
그럼 500km 이상 간다는 것이고,
지난 몇 년 국내에 슈퍼 차저가 엄청 늘어
금방 다시 채울 수 있고 방전에 대한 불안도 없다.
'전기'차로서의 기본기는 역시 테슬라.
전기'차'로서는, 모델 X는 아직 갈길이 멀다.
그래서 모델 X 리프레시 롱 레인지는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고를 수 없는 차다.
그냥 이 차에 끌려야 살 수 있는 차량이고,
그래서인지 오너들의 만족도는 상당함.
애초부터 모델 X 그 자체를 원한 이들이라 그러하다.
어쨌든 iX보다 스타일리시한 외모에 팰컨 윙이 있고
얼리어답터스러운 테슬라의 특징들이 그대로 녹아 있다.
어른이 되었음에도 아이와 같은 감성을 지녔거나
어린 아이 같은 취미를 가진 이들을 키덜트라 하는데
딱 그런 사람들을 위한 차라고 느껴진다.
원래 애들은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파잖아.
모델 X의 특징에 꽂혔다면 사실 답이 없다.
이 차 사는 수 밖에.
나는 어른다운 어른이라 iX M60 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