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세대 그랜저의 출시가 미뤄지며
시한부나 다름없던 K8의 운명이
조금이나마 더 길어졌다.
이미 K8은 출시 당시에 G3.5 모델을 타보고
앞 뒤가 따로 노는 차체와 불안정한 주행성에
아무리 새 플랫폼 가지고 만들었어도
서자인 데에는 이유가 있고
그랜저보다 싸게 나온 데에도 이유가 있다
이렇게 혹평을 했었던 바 있다.
일부러 K8이 내세우는 몇 가지 특징을
확인해보고자 일부러 대중적이지 않은
G3.5 모델을 우선적으로 가져왔었던건데
이래저래 실망만 안겨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사실 최근 현대기아차 그룹의 차량을 타면서
같은 모델 내에서도 파워트레인이 달라지면
차량의 성격이 꽤나 달라지는 경우를
이미 여러 차종에서 많이 경험했기에
K8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차세대 그랜저가 원래 예정대로라면
이미 출시되었어야 했기에 비교도 할 겸
G2.5 다음으로 인기가 높은,
최근 각광받는 K8 하이브리드를 가져왔다.
마침 오늘 2023년형 K8이 출시됐기도 하고.
K8 하이브리드는 현재 판매중인 그랜저 하이브리드와
파워트레인 면에서 완전히 다른 모델인데,
새 플랫폼을 가지고 만든 차량 답게
파워트레인이 더 적극적으로 다운사이징 됐다.
K8 하이브리드는 1591cc 가솔린 터보 하이브리드 유닛이 핵심.
그랜저 하이브리드의 2359cc 가솔린 자연흡기 하이브리드 유닛과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이는 부분이 이 곳이다.
확실히 비용 절감 면에서는 압도적 깡패다.
이 스마트스트림 G1.6 터보 하이브리드 유닛은
연비 하나는 정말 기가막히게 뽑는데,
1591cc 세금(연간 대략 27만원)도 세금이고
적당히 다녀도 18km/l 정도 나오는 연비까지
소형차 유지비로 이런 준대형차를 끌 수 있다니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준대형차를 사는 전통적인 소비층은
1591cc로 이런 큰 차 끌 수 있겠어? 하겠지만
이제 준대형차 소비층이 30대 전후로 크게 내려와
낮은 배기량으로도 과급기와 전동화의 힘을 빌려
잘만 끌고다닐 수 있단걸 다들 알기 때문에
K8 하이브리드는 요즘 시대에 딱 걸맞는 물건.
차마 MZ세대를 위한 준대형차라고는 못 쓰겠다
스마트스트림 G1.6 터보 엔진 자체의 파워도
180마력으로 실용 구간에서 충분히 좋은데
여기에 전기 모터가 힘을 보태
합산 230마력의 최대 출력을 발휘하니
사실상 K8 L3.5 가스 차량(240마력)과 비슷하며
최대 토크는 K8 하이브리드(합산 35.7kg·m)가 더 높다.
전기 모터의 힘은 즉각적으로 발휘되기에
실질적으로 K8 하이브리드의 절대 다수의 오너들에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충분한 파워를 제공한다.
하지만 거기까지. 충분함 그 뿐이다.
이 파워트레인이 올라간 쏘렌토 하이브리드에는
넉넉한 출력감이 느껴져 만족스러워졌는데,
쏘렌토 하이브리드도 덩치가 그리 작지 않은데다
무게는 쏘렌토가 더 무겁고 심지어 SUV인데도
쏘렌토에서는 만족스러웠던 파워트레인이
K8에 얹으니 여유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딱 이 체급을 적당히 끌기 모자람이 없는 수준.
그랜저가 국민차인 세상이라지만
내 머릿속엔 아직도 준대형급 = 고급 승용차
라는 인식이 박혀있어서 그런지
차급에 어울리는 넉넉함을 요구하게 되는데
K8 하이브리드는 여기까지 가진 못한다.
하지만 유지비가 깡패이니 참아야겠지.
K8 G3.5를 타면서 크게 칭찬했던 부분이
새로운 스마트스트림 8단 자동변속기인데
기사로도 났었지만, 투-챔버 토크 컨버터가 신규 적용된
변속 질감이나 성능이나 두루 인상적인 물건이었다.
일단 내가 변속기의 품질에
굉장히 집착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차량의 완성도를 크게 좌우하는 것이 변속기인지라
K8에 신규 적용된 이 스마트스트림 8단 자동변속기는
칭찬을 아끼지 않을 물건이지만 6기통 라인업 한정 적용.
그 말인 즉슨 G2.5와 하이브리드는 해당사항 없다.
K8 하이브리드는 동일 파워트레인 차량들과
똑같이 하이브리드 전용 6단 자동변속기가 적용된다.
준대형 차급에 맞는 부드러운 변속감은 자랑하나
정말 그냥 아무런 생각이 안 드는 평이한 물건.
차세대 그랜저(GN7) 하이브리드가 현대기아차 최초로
하이브리드 전용 8단 자동변속기를 탑재한다는데
역시 베타 테스터는 오늘도 눈물만 훔친다.

실내로 자리를 옮기면 이젠 익숙한 그 K8이다.
12.3인치 디스플레이 두 개가 장착된
파노라믹 디스플레이가 대시보드 분위기를 지배한다.
확실히 현행 그랜저(IG PE)보다 미래지향적 구성이지만
특별히 그랜저보다 윗 급 차량이라는 느낌은
출시 초기나 지금이나 크게 들진 않는다.
대시보드 디자인은 준대형 차급을 감안하면
확실히 너무 간결하게 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K8 G3.5를 타던 당시에는 터치식 전환형 공조 패널이
매우 불편하게 다가왔었으나 스포티지를 자주 타서 그런지
맨날 보는 인터페이스라 이제 친숙해졌다.
실제로 곡 넘김/볼륨 조절은 핸들의 버튼으로 가능하니
공조 패널로 자동 전환되게 설정해두면
필요할 때만 미디어 컨트롤러로 바꾸면 되고
평소에는 공조 패널로 쭉 쓸 수 있어
그렇게까지 불편하진 않다만,
어쨌든 터치식이라 주행 중 시선을 뺏긴 한다.
스티어링 휠이 의외로 꽤나 두툼하고
하이브리드에도 R-MDPS가 적용되기 때문에
조향감도 차의 수요층을 생각하면
적당한 무게감에 맞춰져 있는 편이다.
진지하게 차를 잡아돌릴 생각이면 이걸 왜 사.
기아차의 일반적인 약점이라면
보통 동급의 현대차보다 방음이 모자라게 되어있는데
확실히 K8도 "그랜저보다 반 체급 위"를 지향함에도
하부 방음이 그랜저보다 다소 부족한 편이다.
지난 세대 K7(YG)보다는 조금 더 신경을 쓰긴 했는데
여전히 노면에서 올라오는 소음,
특히 타이어가 굴러가는 소리가 비교적 잘 들린다.
반 급을 올렸으니 올린 만큼 K7 시절보단 낫지만
서자의 위치상 형님을 위협할 수준은 못 된다.
모터가 차를 구동하고 있을 때 엔진 소음이 없으니
자잘한 소리가 귀에 더 잘 들어오게 되는데
그랜저보다 NVH가 그래서 확실히 떨어지게 체감된다.
또한 스마트스트림 G1.6 터보 엔진 자체가
기존의 감마 터보 계보를 그대로 잇고 있어
회전수가 올라가면 부밍음이 꽤나 거슬린다.
직분사 터보 엔진인데다 감마 터보 엔진 특성이 그래서
세타 II 포트 분사식 자연흡기 엔진을 쓰는
그랜저 하이브리드보다 엔진 소음도 더 크다.
여기서 확실히 스마트스트림 G1.6 터보 하이브리드는
준대형 차급에 어울리는 파워트레인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방음이 잘 될 예정인 차세대 그랜저 하이브리드는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K8의 경우는 그렇다.
현행 그랜저 하이브리드의 2.4 자연흡기 엔진이
보다 더 준대형 차급 품격에 어울린다.
승차감은 K8 G3.5보다 부드러운 성향은 덜하지만
적어도 5m가 넘는 전장에 의한 차량 앞/뒤가
제각각 다른 의견을 가지고 따로 노는 증상은
K8 하이브리드에서는 크게 덜해졌다.
아주 없다고 볼 순 없지만
차 길이가 5015mm나 되고
전륜 구동 차량이기에 별 수 없는 것.
G3.5에 적용된 전자제어 서스펜션은
자잘한 요철을 밟았을 시 깔끔하게 처리하질 못했고
그러면서 스포츠 모드로 놓으면 위화감만 늘었었는데
K8 하이브리드의 전자제어 서스펜션 설정값은
하나 된 목소리를 갖췄다는 점에서 훨 낫다.
스포츠 모드로 놓아도 극적인 변화는 전혀 없다는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기본적인 차량 성향이 있으니.
더 뉴 그랜저 하이브리드가 기존 그랜저(IG)의
승차감에 불만을 가진 고객들의 피드백을 반영해
서스펜션을 부드럽게 만들려고 하다 보니
이상하게 잔진동이 길게 지속되며 시트로 전달되는
오히려 승차감이 안 좋아진 희한한 경우가 됐는데
차라리 K8 하이브리드가 댐핑은 조금 더 탱탱하지만
대부분의 충격을 불쾌감 없이 흘려보낸다.
그러나 물침대같은 편안함이나 푹신함을
기대하는 소비자라면 실망할 터.
특히나 K8의 직전 세대 K7(YG)가
워낙 그런 성향이 강했고 안락했기에
그 느낌 그대로를 기대하면 낭패 볼 가능성이 크다.
K8 내에서 승차감을 따진다면
단연 하이브리드가 압도적으로 좋다.
G3.5의 경우 이럴거면 전자제어 서스펜션을
과감하게 빼버리라고 말했었는데,
하이브리드의 경우는 넣는 것을 추천한다.

사람들이 보통 전기차 하면
강한 출력의 전장 시스템 덕분에
오디오가 대개 괜찮다고들 알고 있는데
(이상하리만치 떨어지는 아이오닉 5 빼고)
동일 모델에 일반 내연기관 단독 모델과
하이브리드 모델 간의 차이도 유의미할 정도로 존재한다.
K8을 시작으로 기아차에서 메리디안 오디오를
일부 적용하기 시작했었고,
G3.5는 이상할만큼 보컬 표현력이 부족했었는데
하이브리드는 조금 더 강해진 출력감 덕분에
거의 실종되다시피 했던 가수의 목소리가
이제는 들리는 정도로 개선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족한건 마찬가지.
EV6의 메리디안 오디오는 100만원 값을 하는데
K8의 기본형 오디오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말을 못하겠지만 이건 좀 글쎄다.
평소에 본인이 클래식이나 오케스트라만 듣는다면
분명히 돈을 주고 넣은 값을 할 것인데
일반 대중가요를 듣는 많은 이들에게는
이 정도밖에 못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
다만 현행 그랜저의 JBL도 엉망이고
차세대 그랜저가 어떤 오디오 시스템을 쓸지 모르겠지만
지금 추세대로라면 BOSE를 쓸 확률이 높은데
그렇다면 K8이 웅장함과 타격감에서는 앞설 것이다.
최근에 제네시스를 집중적으로 타서 그런지
K8의 소재가 - 특히 스피커 그릴 - 부족하게 느껴지는데
어디까지나 넘어설 수 없는 벽에 의한 것이고
대중 브랜드의 준대형 차급이라 생각하면
여러모로 적당한 수준으로 보인다.
대시보드의 우드 장식은 조금 저렴해 보인다만
그 외에는 두루 나쁘지 않은 편.
하지만 역시나 실내 소재는 현대차가 좀 더 좋아
풀 옵션인 K8의 시그니처, 그랜저의 캘리그래피끼리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그랜저가 소재나 보기에나 더 낫다.
차세대 그랜저가 어쨌든 내년에는 나올건데,
차를 1년만 리스하고 교체할 재벌이 아닌 이상
실내 감성 품질이 신경 쓰인다면
아무래도 차세대 그랜저를 기다려보는 게 좋다.
차를 1년 타고 팔 재력가라면 사실 K8 안 사지
다만 도어트림의 디자인은 확실히
고급감을 추구했다던 명색에 맞게
멋지게 구성되어 있고,
어떤 면에서 렉서스 LS를 참고한 느낌도.
의외로 대중 브랜드 답지않게
K8이 내/외장 디자인의 통일성은
충실하게 곳곳에 구현해둔 편인데,
외부의 그릴에 사용된 마름모꼴 무늬가
도어트림에 많이 사용되어 있고
대시보드 및 버튼류에도 적용되어 있다.
시트의 착좌감은 나쁘지 않았으나
에르고 모션 시트가 적용됐다고 홍보하는 대로
특별하게 안락하거나 푹신하진 않다.
그래서 K8 하이브리드는 따지고 보면
나머지 K8 모델들이 아쉬움을 주었던,
꽤나 부족했던 면모들을 거의 다 개선한 모델.
하이브리드라고 해서 무조건 상품성이 좋다거나
주행 질감이 좋아지거나 하는 것은
스포티지 하이브리드만 봐도 아닌데,
K8 하이브리드는 적어도 K8 내에서는 왕이다.
비록 준대형이라는 차급에 어울리지 않는
전반적인 파워트레인의 질감이 문제지만
그 파워트레인이 아껴주는 유지비를 생각하면
꾹 참고 넘어갈 만 하다.
어차피 타고 다니는 데 문제가 생길만큼
동력 성능이 부족한 건 절대 아니니까.
동네 마트 같은 곳에서
"실속 있는" 상품이라고 홍보하는 문구가
딱 머릿속에 떠오르게 만드는 차였다.
분명 K8 하이브리드는 완성도 면에서
꽤나 괜찮으면서 굉장히 낮은 금액으로
이런 큰 차를 끌고다닐 수 있고
이는 많은 이들에게 굉장한 메리트다.
실속을 따져서 차를 구입하는 젊은 세대,
특히 30대에게 어울리는 차량이다.
그러나 진정 생각이 있다면
K8을 사지는 않을 것이다.
차세대 그랜저의 출시가 목전에 있는데다
지금 K8 하이브리드를 계약해도
어차피 신형 그랜저 출시 시점 쯤에 받게 된다.
그렇다면 그냥 차세대 그랜저의 출시를 기다렸다
사전계약을 진행한 후 초기 물량을 인도받으면 될 일.
똑똑하고 가성비를 따지는 이들을 위한 K8이지만
정말로 똑똑하고 가성비를 따진다면,
특히나 차는 한 번 사면 오래 사용하는 제품이란걸
감안했을 때에는 역시 그랜저가 답.
하지만 꼭 K8을 사야겠다면 하이브리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