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시승기를 작성하면서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동차는 짧게 타보고 다 파악하기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물건인데,
이 정도 타보고 다 아는것마냥
글을 그대로 써도 되는걸까?
1999년생인 난 이제 고작 24살이고
나 스스로를 돌아봐도 해가 갈수록
조금씩 더 성장해가는 게 와닿는데다
시간이 지나서 같은 차량을 다시 타보면
그간 새로 누적된 비교군과 데이터 탓인지
감상이 사뭇 다른 경우도 이따금 있다.
그래서 이번엔 준비했다.
보통의 경우보다 조금 더 길게
여유를 가지고 타고 다녀보면서
맞닥뜨렸던 상황이나 함께했던 시간들,
기존에 작성했던 시승기와
어떤 점에서 또 달라졌는지
간략하게 되돌아보는 그런 시간.
차량에 대한 체험은 길게 했으니
롱-텀 시승기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미 시승기를 한 번 적었기에
빠르고 간략하게 짚는
숏-버전의 시승기.
그 첫 타자는 쉐보레의 더 뉴 말리부.
사실 더 뉴 말리부는 단종을 앞둔 차.
아무래도 말리부의 운명은
올해인 2022년이 마지막이 될 확률이
굉장히 높다. 북미 현지에서도 단종 예정.
자동차 시장이 SUV 중심으로 재편된지
벌써 십 여 년 정도 흘렀고,
더 뉴 말리부의 2021 연간 북미 판매량이
무려 4만대를 밑도는 수준이었기에
어찌보면 아직까지 팔고있는게
GM답지 않게 신기할 정도이다.
여담으로, 몇 년 전 단종된 크루즈는
단종 직전 해 북미 연간 판매량이 18만대.
이미 지난 2월부터 북미에서는
2022년식에 대한 주문 접수를 중단했다.
세그먼트 킹 도요타 캠리가
여전히 연간 30만대나 팔고 있고
현대자동차의 쏘나타도
9만대 넘게 팔았으니,
말리부의 성적표는 객관적으로 봐도
그닥 좋지 않다.
국내에서도 사정은 비슷해서
여전히 왜 사는지 이해가 안 되는 K5가
상당한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데 반해
말리부는 한 달에 200대 팔기도 힘겹다.
그렇다면 더 뉴 말리부가
이렇게나 안 팔릴만한 차인가
시승기를 처음 적던 1년 반 전에도
그건 아니라고 했었는데,
지금 봐도 이 생각엔 변함이 없다.
분명 더 뉴 말리부는 괜찮은 차다.
특히나 낮은 판매고로 인해
비교적 저렴하게 구성한 가격표를
한번 들여다보게 되면 놀랄 정도.
길게 타보아도 인상이 변하지 않은
더 뉴 말리부의 최고 장점은
단연 승차감을 꼽을 수 있겠다.
타이어 공기압을 250kPa(36psi)로 맞추니
중형 세단 중에서는 가장 안락하다.
17인치가 꽂혀 있어서 더더욱 그런데
19인치를 굳이 돈 더 주고 달 필요는
여전히 전혀 없어 보인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처음 썼던 시승기엔
승차감 언급을 아주 간략하게 했네?
승차감이야말로 더 뉴 말리부의 무기.
전형적인 미국인들 선호에 맞춘듯한,
감자칩 부스러기가 굴러다니는 푹신한 소파 같다.
가죽도 좀 까지고 이따금 냄새도 좀 나는
그런데도 푸근한 거실 내 존재감 1인자.
아침밥 먹으러 일어나서 차 문을 열고
안락하기 그지없는 말리부 시트에
몸을 기대면 정말 편안하다.
역시 허리디스크 고치는 차 아니랄까봐
달리는 한방병원 명성에 걸맞게
기분 좋은 푹신함이 운전자를 달랜다.
한동안 말리부를 쭉 타고다니면서
시트의 중요성과 시트가 승차감에 미치는 영향
이 두 가지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1349cc 터보엔진은 더 뉴 말리부의 실패 원인.
국내 소비자들은 여전히 중형차 = 2000cc
공식에 틀어박혀 있는데,
혼자서만 앞서가면 뭐하나.
동급 배기량의 중형세단이 하나 더 있는데
그 차 역시도 대차게 망했다.
그런데 엔진 자체는 정말 좋다.
3기통 특유의 진동 소음이야 뭐
낮은 자동차세로 위안받아야 하는데
동력 성능이 배기량 대비 상당하다.
180km/h 이상에서는 가속력이 실종되어서
이 차의 최고 속도가 얼마인지 모르겠다.
계기판에 앞자리 2를 보는 것 자체가
아주 긴 직선구간을 필요로 한다.
더 뉴 말리부 E-Turbo가 대체한
올 뉴 말리부 1.5 터보의 최고 속도는
참고로 218km/h에서 제한되고,
낮은 배기량 대비 초고속 영역에서의
꾸준한 가속력에 놀랐던 바 있다.
실용 구간에서의 가속력은 꽤나 빨라
타고 다니면서 "말리부 좀 나가는데?"
소리 몇 번 들었으니, 힘은 충분하다.
더 뉴 말리부 E-Turbo의 장점 두 번째.
바로 말도 안 되는 연비다.
일상적인 주행 시 시내에서도
미친 수준인 9-10km/l를 오가며,
고속도로에서 연비 주행 시
16-17km/l 정도 기록할 수 있고
정말 끝까지 쥐어짜면 20km/l도 찍힌다.
시승기에 연비 이야기 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데 얘는 안 할 수가 없다.
사실 내가 연비에 별로 관심이 없음
미국차라서 그런가 연비가 이 정돈데도
연료탱크가 비교적 큰 62리터.
동급에서 제일 작은 SM6(51L)보다
11리터나 더 들어가는 것이다.
편안하게 타는 차라는 컨셉에 충실하게
귀찮게시리 주유소에 자주 안 가도 된다.
특이하게 쉐보레 차량들은
각종 경고등에 조금 민감한 편이라
조금 과격하게 다루면 여지없이
곧바로 경고등이 점등되는데,
더 뉴 말리부 또한 예외가 아니다.
타고 다니면서 엔진 경고등을
갈구면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점등 시 악셀 리스폰스가 이상해진다.
내 짐작 상 전자식 wastegate에 문제가 있어
터보 압력 조절이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은데
서비스 센터 입고해서 경고등을 꺼트려도
비슷한 환경에서 다시 점등되니,
엔진 자체가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으면
타사보다 일찍이 손을 드는 느낌.
조금 아깝긴 하다.
가벼운 공차중량과 더불어서
엔진이 3기통인 덕분에
가벼운 앞머리가 길쭉한 더 뉴 말리부를
날렵하게는 아니지만 정확하게
그리고 시키는 대로 꽂아넣기 때문.
의외로 놀란 부분은
강한 제동이 반복되는 환경에선
"과열 방지를 위해
브레이크 사용을 줄이십시오"
라는 경고 문구가 계기판에 뜬다.
ABS 작동여부도 띄워주는 쉐보레라
친절하긴 정말 친절하다.
경고등 뿐만 아니라 경고 문구도
자주 띄우는 투 머치 토커.
그런데 이 경고는 일반적으론
볼 일이 없을 것이니 걱정 말길.
소싯적 '쉐슬람'들이 활개치던 시절부터
쉐보레 차량들이 차대가 튼튼하단 느낌을
여러 모델들을 통해 전달했었는데,
더 뉴 말리부 또한 마찬가지다.
비틀림 강성이 유독 좋단 인상이
타는 내내 든든하게 지켜줬다.
그래서 푹신하고 부드럽게 설정된
서스펜션을 갖추고도
날아갈 것 같은 불안감이 없다.
미국차라 그런지 수납함 자체는 적진 않다만
도어트림 손잡이 부분 수납함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
립밤 하나 들어가면 딱 맞는 사이즈.
그리고 대시보드 하단의 수납공간도
요즘 스마트폰들의 대형화 추세에
아무래도 안 맞지 않나 싶다.
너무 얕고 폭이 좁기 때문에
케이블로 연결한 스마트폰을 둘 곳이
별로 없고 떨어지기 쉽게 노출된다.
다행히 2021년식부터 무선으로
카플레이와 안드로이드 오토 연결이 가능하나
동전 몇 개 던져두는 용도 외에는
조금 좁고 얕은 느낌이 강하다.
컵홀더도 날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스 벤티 사이즈를
홀더와 함께 꽂으면 꽉 낀다.
뭐든 빅 사이즈인 미국 답지 않다.
LED 헤드램프를 선택하려면
강제로 프리미어 등급까지 올라와야 하지만
LED 헤드램프의 품질 자체는 괜찮은 편.
단 돈 54만원이니 무조건 달아라.
쉐보레답지 않게 시동 후 점등 시
세레모니까지는 아니지만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며 비추는
짧은 애니메이션이 있다.
쉐보레가 웬일이지?
오토 윈도우 로직이 좀 희한해서
원하는 곳에 멈추기가 어렵다.
도어 캐치가 몇 단계로 나뉘어 열리듯이
쉐보레의 오토 윈도우는 단계가 있는 듯.
전화 키패드 같이 생긴 공조 조절 버튼은
버튼 배치만 적응되면 아주 편하다.
가상의 수동 변속 모드 조작법이
기어레버 우측 토글을 사용한다는 건
남들이 이미 지겹게 욕을 했기에 넘어가는데
기어 게이트 패턴이 일자형이라
안 보고 P에서 D로 이동하려
쭉 내리면 L단으로 가는 것도 불편.
트레일블레이저도 마찬가지인데
L단만 꺾어서 진입하게 만들어주면 고맙겠다.
웃기게도 일반 토크컨버터식 자동 변속기라면
L모드에서 1단 레드존 달성 시
퓨얼컷에 걸려 전혀 가속이 안 될텐데
더 뉴 말리부는 CVT를 탑재해서
레드존에 도달한 채 계속 가속된다.
마치 구형 CVT 차량들의
풀 악셀 시 터질 것 같은 느낌
그것 그대로를 체험할 수 있어 신박하다.
쿠페형 라인을 채택한 탓에
트렁크의 물리적인 용량이
동급에서 제일 작은 447L.
깊이는 꽤 깊은데
높이가 낮은 편인데다
트렁크 안쪽에 손잡이가 없다.
혼자 사는 내가 평소에 마트에서
장 봐 오는 수준 정도는 충분한데
좀 높이가 있는 물건은 어렵다.
그냥 뒷좌석에 구겨 넣던가,
그마저도 안 되면 SUV를 동원해야.
트렁크가 작은건 미국차치고 의외다.
참고로 북미에서 동급 최강자 캠리는
427리터라 더 뉴 말리부보다도 작다.
저공해 제 3종 차량이라
공영주차장 50% 할인이 은근 쏠쏠하나
남산터널 혼잡통행료는 그대로 내야 한다.
주차 시 사이드미러가 자동 하향 되는 것도
더 뉴 말리부를 타면서 편했던 것 중 하나.
짧게 쓸거라고 해놓고 이만큼이나 썼는데
"이렇게 괜찮은데 왜 안팔릴까요?"에 대한
대답은 이미 이전 시승기에서 답했으니
조금 다른 엔딩으로 글을 마무리하자면,
타고 다니면서 일관성 있게 편했고
또 일관성 있게 불편했다.
늘 한결같이 안락한 시트에 몸을 맡겨
훌쩍 근교로 떠나갔다 돌아와도
탄탄한 고속 안정감에 피로감이 적었다.
반면 시덥잖은 걸로 승질나게 하는
마이링크나 자잘한 문제들은
"에휴, 쉐보레가 그렇지 뭐"하고
한숨 한 번 쉬고 넘어가고 말았다.
이 차는 난폭한 운전 스타일을
차 자체가 거부하는 편.
차를 몰아붙이기 시작하면
여유를 많이 둔 댐핑과 스프링에 의해
"내가 기본적인 것들만 충분히 한댔지
이정도를 요구하면 되겠나"하며 발끈하고
무시하고 계속 달릴 시
화려한 경고등이 나를 감싸네.
서킷에 집어넣고 돌린 것도 아닌데
브레이크 디스크가 마치 게임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건 이 차를 통해 처음 봤다.
제동력 유지력은 나쁘지 않은데,
냉각 없이 계속 고문하면
용광로에서 볼 법한 색깔이 나온다.
개발 당시 한국에서 많이 관여한
더 뉴 말리부는 그래도 지극히 미국적인 차,
아니 미국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차로
남았다고 보면 딱 맞는 것 같다.
햇살 좋은 초여름에
하와이안 셔츠 한 장 걸치고
선글라스를 얹고 차에 올라
창문을 쭉 내린 다음 팔을 걸치고
유유자적 나긋나긋하게 크루징하는
딱 그런 용도에 걸맞는 차량이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촌스러운 컨트리 음악까지.
더 뉴 말리부의 실내도 유행에 뒤처졌지 않은가.
타격감에 집중한 BOSE 9 스피커 유닛이
또 여기에는 상당히 잘 어울린다.
2.0 터보 모델이 이 용도에 더 맞긴 한데
난 젠3 6T40 변속기가 싫으니, 대신
E-Turbo 모델도 부족하지 않은 힘을 갖춰
딱 이런 용도로 쭉 갖고다니고 싶은 차다.
차분하면서 경량화에 힘 쓴 탓에
은근히 날쌘돌이인 차에 3기통 엔진이
궁합이 더 좋다 생각이 들기도 하고.
길게 느껴본 더 뉴 말리부의 매력을
짧게 정리하고자 했던 처음 의도와
글이 약간 빗나갔지만,
요약하자면 이거다 :
인기가 없어 없어지는게 아쉬운
은근히 만족감 높은 중형 세단.
지금 국내에서 최고 인기를 구가중인 K5와
제일 인기없는 더 뉴 말리부 중 선택하라 하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리부의 키를
번개보다 빠르게 집어들 것.
소비자들이 바보는 아니지만,
가끔 시장이 돌아가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9세대를 아우르는 긴 역사를 지닌
말리부를 이제 보내줄 때가 됐다는 게
세상이 얼마나 급진적으로 바뀌는 지
새삼 오늘도 다시 한 번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