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차들이 있고
내가 그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전부 좋아할 순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나는 정말 다양한 차들에 관심을 가지고 좋아한다고
스스로 계속 생각해왔던 터이다.
큰 차, 작은 차, 힘 좋은 차, 높은 차, 뚜껑 열리는 차 등
큰 편견 없이 새로 나오는 차들을 바라보고자 늘 신경을 쓴다.
요즘 들어서 나 조차도 자꾸 크고 안락한 차를 찾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자동차 그룹 중 하나는
바로 '핫 해치백'이라고 분류되는 녀석들이다.
속도를 많이 내지 않아도 어지간한 스포츠카 뺨치는 스릴에
요리조리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즐겁고 당찬 녀석들.
그 와중에 해치백이라 실용성도 좋고 디자인도 개성이 넘친다.
600마력이 넘는 고성능 스포츠세단들도 이따금 독특한 색을 칠하지만,
핫 해치백들만큼 그 어떤 밝고 튀는 컬러를 칠해도 자연스러운 차는
아마 세상에 없으리라 확신한다.
이런 차들을 만들어서 유명해진 회사는 생각보다 꽤 된다.
핫 해치백의 원조격인 골프 GTI를 만든 폭스바겐,
VTEC으로 귀를 찢고 운전재미로 입도 찢는 혼다 시빅 타입R,
같은 이름의 아류작이 아닌 전설격의 푸조 205 GTi와
전륜구동을 만든 나라에서 온 차 다운 클리오/메간 R.S.등
타이어를 찢어버릴 고출력 차량을 굳이 만들지 않고도
운전재미로 정평이 나도록 회사의 인지도를 확 끌어 올릴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동안의 현대자동차의 이미지는
운전하기 즐겁다기 보단 가격 대비 많은 옵션과 긴 보증기간을 자랑하는
저렴하고 (국내한정) 대안이 별로 없어서 타는 차 수준에 머물렀었다.
스쿠프 터보와 티뷰론, 투스카니, 제네시스 쿠페 등
국산 고성능차 계보가 아주 없다고 보긴 뭐하나
세계 무대에 내놓았을 때 운전재미, 성능 둘 다 내세우기 뭐한 아이들이 전부였다.
그런 현대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고성능 'N' 브랜드의 첫 작품.
바로 벨로스터 N이다.
해외에는 i30 N을 팔고 있지만
국내에는 무슨 사정으로 팔지 않기에,
국산 고성능차의 본격 부활을 알리는 차라고 할 수 있다.
또 정말로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최초의 국산차이기도 하다.
거기에 현대가 드디어 개발을 끝낸 습식 8단 DCT를 새로 얹었다.
이미 수동 전용 모델을 팔 때부터 가성비 좋고 운전재미가 뛰어난 펀카로
유명세를 떨친 상태인데, 새 변속기를 얹은 벨로스터 N DCT는 어떨까.
미니 쿠퍼 시리즈가 국내 판매중인 저렴한 펀카 중에서
운전재미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과연 벨로스터 N DCT에 설득당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핫 해치백'이 갖춰야 할 미덕은 대충 이렇다.
활기찬 몸놀림. 경쾌한 발놀림. 시시한 세상을 밝게 물들이는 존재감.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지켜보면서부터 시작해서
차에 올라 운전하는 내내 차주가 함박웃음을 짓게 해야 하고
비즈니스 클래스 항공기보다는
카파도키아 상공을 나는 형형색색의 열기구 같아야 한다.
결론부터 적자면, 벨로스터 N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빠르게 달리는 데 있어서 운전자의 실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코너를 돌아나갈 때는 굉장히 진중해서 스포츠카를 연상케 한다.
BMW M GmbH 출신 비어만 사장이 개입한 차량이
대충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차량 거동에서 F82 M4가 약간 떠오른다.
다루기는 그보다 훨씬 쉽다. 차가 다 해준다.
차가 빠르게 달리는 데에, 특히 코너를 빠르게 도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와인딩 로드에서 앞서가는 이 차를 쫓아가려면
독일산 D-세그먼트 준고성능 모델 정돈 와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성능을 내는 차량을 만들 정도로
발전한 현대차의 서스펜션 및 하부 조율 능력에는
정말 아낌없이 칭찬을 해야 됨이 분명하다.
수동 미션을 들어내고 새로 장착한 습식 8단 N DCT의 성능도
정말 탁월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이런 성능이 나오는지.
요즘 현대가 디지털 클러스터의 바늘속도로 사기를 치는걸 제외하면
내가 이제껏 본 현대차 중 RPM게이지 바늘의 움직임이 가장 빠르다.
기어의 체결감, 직결감 모두 뛰어나고
변속 패턴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셋팅이 되어 있다.
현대차에서 이를 악물고 개발한 것이 틀림없다.
개발하면서 프로 선수들 불러놓고 변속 패턴 다 조사했음이 눈에 선하다.
이 정도면 아우디의 S-tronic DSG의 수준은 아득히 뛰어넘는다.
NGS를 활성화하면 마지막 남은 한방 펀치까지 끌어오는 느낌.
NGS가 작동하는 20초간의 강렬한 가속감은
벨로스터 N DCT가 가진 비장의 카드이자
마지막 승부를 위해 숨겨둔 긴 장도(長刀)를 꺼내드는 듯하다.
같은 기반엔진을 사용하며 출력도 큰 차이 없는 G70이나 스팅어 2.0T는
터보랙은 물론이고 출력 대비 정말 안 나가게 느껴졌는데,
가속 시 감각 자체가 벨로스터 N이 월등하게 뛰어나다.
차량의 성격 차이라고 보기엔 그보다 두 단계 남짓 더 우수해서
벨로스터 N DCT의 파워트레인은 칭찬을 안할 수 없다.
난 카본 파츠나 알칸타라 실내 장식을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현대가 N 퍼포먼스 파츠 시리즈를 런칭하여
고성능차에 어울리는 악세서리를 제공하는 것 역시도
꽤나 긍정적으로 바라볼 만한 요소.
이 차가 인제 스피디움에서 랩타임이 왜 이렇게 빠른지
타보니까 바로 수긍이 가능하다.
코너를 돌아나갈 때에도 노면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으며
eLSD가 차량이 apex를 지나 말려들어가게끔 잡아넣는다.
이 차가 '빠르다'는 데에는 반박이 불가능할 정도로
굽잇길에서는 정말 번개같다.
하지만 위에 적은 내가 생각하는 핫 해치의 미덕과는
글쎄, 별로 어울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국내에 파는 수입 해치백과 비교했을 때,
가장 거동이 무미건조하고 운전자가 할 거리가 없다.
한참 느리고 한참 안나가는 클리오 디젤이
코너에다 집어넣으면 이보다 훨씬 즐겁고 재미지다.
굳이 미니랑 비교할 것 까지도 없다.
운전자가 운전하며 얼마만큼의 행복감을 느끼고
얼마나 큰 웃음을 짓냐 생각할 때
미니(JCW든 아니든)가 100이라고 하면
벨로스터 N DCT는 30? 잘 쳐줘야 40? 정도이다.
벨로스터 N이 빠르기는 그들보다 월등히 빠르다.
근데 진정으로 운전하기 즐겁고
운전자를 운전에 얼마나 끌어들이느냐를 재보면
벨로스터 N DCT는 '차'가 잘 도는 것이지
'운전자'가 잘 도는 것이 아니다.
앞서 계속 좋다 말한 것 처럼 차가 빠르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근데 핫 해치백은 무조건 빠르게 달리려고 나온 차가 아니다.
당연히 일반 차량보다야 좀 더 빠르겠지만,
'직빨', '랩타임' 보다는 '감각', '즐거움'에 더 중점을 둬야하는 모델인데
내가 지금 다시 가서 미니를 제쳐두고 벨로스터 N을 타서
산길을 헤집고 다니고 싶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선수도 아니고 나한테 랩타임이 무슨 소용인가.
"나는 맨날 인제나 포천이나 영암에 가서 살고
빠른 랩타임을 위한 어택용 차가 필요하다" 하면
벨로스터 N DCT는 저렴한 가격대에선 이만한 게 없다.
근데 단순히 즐거운 운전을 원하는 대다수의 소비자에게
정말 그게 무슨 소용인지 잘 와닿지가 않는다.
하찮은 출력과 별거 없는 전자장비로도
산책 나간 강아지처럼 활기차게 달려야 하는게
핫 해치백 아닌지.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현대가 본격적으로 처음 고성능차를 만들어서
이만큼이나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모델을 만들었다고
자랑 할 만한 기념비적인 차량은 맞다.
그런데 기존에 운전재미로 유명한 차들,
특히나 핫 해치백들과는 좀 많이 다르다.
eLSD가 안쪽을 향해 억지로 잡아넣는 느낌 자체가
자연스럽지 못하게 다가온다. 인위적이다.
미안하지만 내가 원하는 주행감은 이런 게 아니다.
지상고가 높은 크로스오버인 DS의 DS3 크로스백이
이거보다 운전하기 재밌을 것 같다.
3기통 엔진에 얇디얇은 타이어를 신은 미니 쿠퍼는
트램펄린 위를 뛰노는 아이같은 활력을 시내에서조차 선사하는데
벨로스터 N은 그런 게 없다. 그에 비하면 훨 시시하다.
핸들 역시 굉장히 무겁고, 기본 모드에서조차 너무 무겁다.
스포츠나 N 모드에서만 무겁도록 좀 바꿔주면 좋겠다.
그런 와중에 앞바퀴와의 직결감은
돌덩이같이 핸들 무게감을 설정한 것 치고 그렇게 뛰어나진 않다.
다만 승차감 자체는 미니보다 나아서 다행.
미니의 승차감이 이번 세대에 와서 많이 좋아졌음에도
여전히 망치로 허리와 엉덩이를 치는 듯한 느낌이 좀 드는데
벨로스터 N은 좀 딱딱하지만,
일상적인 용도로 타고다니기 힘들 정도로 승차감이 나쁘진 않다.
미니보다 낫다는거지 유쾌한 감각은 아님.
시승한 차량에는 N 퍼포먼스 파츠가 하나 빼고 다 들어간 상황.
바로 버킷 시트가 빠져있었다.
버킷 시트도 시트 포지션이 높아서 욕을 먹고 있는데
일반 시트도 최저 시트포지션이 높은 것은 이상한 건 아니다만
고성능 차를 표방한다면 시트를 더 내릴 수 있게 꼭 좀 만들면 좋겠다.
시트 포지션이 높아도 너무 높다. 이건 쏘나타가 아니지 않나.
브레이크의 제동 능력은 그럭저럭 양호하지만
현대의 슬로건대로 "모터스포츠의 두근거림을 일상으로"가 이루어지려면
브레이크를 업그레이드 할 필요가 생길 것 같다.
일상에서 상당수의 벨로스터N 오너들처럼
멈출 줄 모르고 칼치기 및 난폭운전을 일삼으면,
그리고 운전실력을 맹신하는건지 차를 과신하는건지
남산이건 북악산이건 갖다 꽂는다면
브레이크를 쓸 일이 적어서 상관이 없으려나?
미니 JCW의 브렘보가 충분한 제동 파워를 내면서도
차를 팍팍 잡아치운다는 느낌 없이 정확한 제동감을 전달한다는 점,
그리고 서킷에 넣고 돌릴거면 이쪽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제동력의 지속성은 이쪽이 더 길다는 점에선
벨로스터 N DCT가 아직 보고 배워야할 점이 꽤 남았다.
여담이지만 오늘 공개한 i20 N에는 빨간색 버튼으로
레브 매칭 활성화 버튼을 새로 추가했던데,
내가 보기엔 NGS 진입 버튼을 이렇게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안 그래도 NGS가 활성화되면 계기판 내 디스플레이에
빨간색 테마의 초시계가 20초를 카운트다운 하는데
N 시그니쳐 컬러랍시고 오만 데에 퍼포먼스 블루를 도배하느니
이게 더 시각적으로 자극이 될 듯 하다.
아, 그리고 i20 N은 디지털 클러스터를 도입하여
아반떼(CN7)와 동일한 테마를 그대로 넣어놨던데,
그런 멍청한 실수는 앞으로 연식변경 해도 안 하길 바란다.
아날로그 클러스터에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는 빨간 바늘이
달리는 맛을 자극하는 것도 꽤 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벨로스터 N DCT는 빨리 달리는 데에 올인한 차량이다.
만약 비교적 적은 금액을 지불하고 산길의 제왕이 되고싶다 하면
벨로스터 N DCT를 구입하는 것이 완벽한 해답이다.
운전자가 운전을 잘해서 와인딩 로드를 제패한건지 차가 다 한건지
불분명하지만 어찌됐건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건 맞지 않은가.
또 서킷에서 새로운 기록 경신에 계속 도전하고 싶고
내가 기록한 랩타임을 지속적으로 남들과 비교하며 경쟁하고 싶다면
벨로스터 N DCT는 이런 역할 역시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그러나 전통적인 핫 해치 시장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냈다기 보다는
오히려 한 체급 높은 메가 해치 시장에 발을 들인 것에 가깝다.
혼다 시빅 타입 R(FK8), 메르세데스-벤츠 A45, 골프 R 등.
이들은 강력한 성능을 내세우며
탈-해치백의 능력을 강조하는 모델들인데,
벨로스터 N DCT의 성향도 이쪽과 가깝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 차는 대단히 빠르고,
이런 차종들과 비슷한 클래스로 묶어도 된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조율을 잘 해놓았다. 분명한 강점이다.
하지만 순수한 운전 재미 면에서는
출력이 이보다 낮고 랩타임이 이보다 느린
전통적인 경쟁작들,
골프 GTI나 미니 JCW가 운전하긴 훨씬 즐겁다.
폭스바겐그룹 차량들이 기계적인 특유의 맛은 한층 강하고
미니는 확보중인 팬층이 두둑한 데에는 독보적인 매력이 뒤에 숨어 있다.
또 이들도 주행 성능에서 크게 빠진다고 보긴 어렵다.
강아지에 대해 내가 거의 아는 게 없지만,
미니 JCW의 경우는 닥스훈트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작고 귀엽고, 깡깡 활기차게 짖어대며 사고뭉치처럼 사방을 휘젓는다.
반면 벨로스터 N DCT는 시베리안 허스키에 가깝다.
듬직하고, 힘도 세고 능력도 좋으며 강도를 단숨에 쫓아버릴 기세다.
그런데, 모두가 지킬 강아지가 필요할정도로 넓은 마당을 가진 주택에 살진 않는다.
반려견으로써의 매력은 주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느끼겠지만
활기차고 애교도 많고 재롱도 잘 떨고 밝은 닥스훈트가
일상에서 보다 생기넘치고 행복을 좀 더 가져다주지 않겠는가?
진중하고 듬직한 허스키가 좋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반려견에 우리가 으레 기대하는 매력이란 이런 것이지 않나.
아,
그리고 닥스훈트도 본래 사냥개다.
.
.
.
.
벨로스터 N DCT를 타보고 오니
곧 출시될 코나 N이 매우 기대가 된다.
위에서 벨로스터 N은 핫 해치로서의 매력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핫 해치백과 소형 고성능 크로스오버는 엄연히 다른 세그먼트다.
코나는 기본값 자체가 굉장히 스포티하게 셋팅되어 있는 차종이고
벨로스터 N이 보여준 능력을 코나에 접목시킨다면,
폭스바겐의 티록 R이나 미니 컨트리맨 JCW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N 브랜드의 초강력 카드 중 하나로 부상할 수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동일한 2.0L 터보 275마력에 N 코너 카빙 디퍼렌셜, 8단 N DCT라니.
테스트중인 스파이샷이 이미 다수 잡힌 만큼,
곧 등장할 것이 분명한데.
기대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