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크는 지금까지도 별 다른
파격적인 신차가 딱히 없는 재규어랜드로버(JLR)에
신선하면서 젊은 이미지를 가져다준
한마디로 와일드카드 같은 존재나 다름없었다.
1세대 이보크는 빅토리아 베컴 씨가
디자인에 참여했던 것으로도 유명한데,
축구선수들의 끝없는 레인지로버 사랑을
우회적으로 랜드로버 측에서 표시한 것이기도 하고
'괄괄한 중장년층 아저씨들이나 많이 타는 차'
라는 레인지로버의 이미지를 이보크를 통해
날려버리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재규어랜드로버같은 회사는 풀 체인지 주기가 길다.
그래서 사실 이보크가 출시된지 벌써 11년차인데
이제서야 2세대를 팔고 있는 것이다.
2세대의 페이스리프트 버전도 아니다.
국내의 경우에도 이보크는 은근히 꾸준하게 팔리는,
이보크가 타겟으로 삼은 딱 그 구매층인
젊거나 젊고 싶은 여성 오너들이 꾸준히 사주는
나름 니치 마켓을 잘 발굴해낸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2세대의 첫 수입 당시에는 디젤 모델이 수입됐는데
4기통 인제니움 디젤 엔진이 내구성 문제 및
각종 결함으로 국내엔 수입이 중지되고
가솔린 SUV에 대한 선호가 나날이 증가함에 따라
P250이라는 4기통 인제니움 가솔린 터보에
8단 자동변속기를 물린 조합이
이보크의 주력이자 유일한 파워트레인으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팔리고 있다.
사실 나는 아직도 SUV = 디젤 공식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이번에 디젤에 마일드 하이브리드도 더해져
사실 D200(MHEV) 모델이 제일 탐나는데
아쉽게도 P250 모델만 수입한다고 한다.
사실 이 차는 작년에 시승한 차량이라
시승 당시에 2021년식 차량 재고가 막바지고
2022년식은 반도체 수급 문제 및 원자재 가격 인상으로
차량 가격이 인상될 거라 했었는데
460만원 인상되었다. (6990만원 → 7450만원)
그때 당시에 6990만원에 500만원 프로모션으로
6490만원이라는 꽤 괜찮은 가격표가
붙어 있었는데, 지금 기준으로도
워낙 차값들이 많이 올라서
프로모션이 유사하다는 가정 하에는
꽤나 괜찮은 것 같다.
그런데 랜드로버는 인터넷에서는
'3대 사야 하는 차', '맨날 고장나 못 탈 차',
'사면 서비스센터에서 시간 다 보내는 차'
라는 인식이 팽배하고 실제로 랜드로버의
품질 관련 점수가 굉장히 낮기도 하다.
그렇지만 꾸준히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는걸까?
데여보지 않은 내가 이런 속 편한 소리를
하는 것은 '스트레스 안 받아봐서 그래'
싶기도 하겠지만, 사실 정말 궁금했다.
풀 사이즈 레인지로버야 워낙 명성이 자자하니,
그리고 레인지로버를 살 정도의 재력이면
레인지로버를 사업소에 맡겨놓고도 탈 다른 차가
차고에 주차되어 있을 확률이 높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이보크는 뭘까?
모두들 알다시피 이보크의 가장 강력한
셀링 포인트는 역시나 내외관 디자인이다.
레인지로버 패밀리의 가장 어린 친구 답게
길이가 4.4m가 채 안되는 작은 체구.
그렇지만 레인지로버 패밀리다운 당당함은
이보크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는데,
전폭이 1904mm로 싼타페보다 넓다.
짧은 길이와 낮게 깎여나간 루프라인만 보면
작고 귀여운 베이비 레인지로버인데
은근히 넓은 떡대가 존재감을 과시한다.
랜드로버의 표기 상 '프리미엄 LED 헤드램프'가
선두에 나서 날렵하면서도 여전히 귀여운 마스크를,
후면을 가로지르는 테일램프와 바가 한결 당당해진
뒷태를 두루 완성하여 여전히 이쁜 외모가 무기이다.
후면 디자인은 조금 더 자태가 낮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긴 하지만,
이만하면 꼬마 악동에 충분히 어울린다.
난 개인적으로 원톤 휠은 조금 불만인데
프리미엄 브랜드 중에서도 꽤나 상위 티어에
멋드러지는 차량 외관을 생각해서라도
다이아몬드 커팅 마감의 투톤 휠을
수입 시 기본 구성에 포함시켜주면 고맙겠다.
인디비주얼 오더 하자니 500만원의 프로모션을
휠 하나 바꾸자고 그대로 날려먹을 순 없잖아.
차라리 109만원 더 받고 그걸 끼워주는게 낫다.
(랜드로버 홈페이지 상 109만4천원 추가되는 휠)
인테리어로 자리를 옮기자 다시 한 번 감탄이.
벨라나 레인지로버 스포츠, 보그까지 통틀어
상위의 모델들과 인테리어가 판박이이다.
메르세데스-벤츠 C-클래스가 지난 세대부터
베이비 S-클래스 별명에 걸맞는 인테리어를 갖춰
동급에서 고급감으로는 독보적 선두에 섰던 그 모습을
SUV 시장에서 이보크를 통해 제대로 보게 된 것 같다.
낮은 차급의 C-SUV가 이런 가격표를 붙일 수 있는 이유.
패밀리 룩의 좋은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1시리즈의 인테리어 디자인 큐를 7시리즈에 그대로 쓰는
BMW같은 나쁜 사례와는 궤가 완전히 다르다.
수평형 레이아웃인 깔끔하고 세련된 실내가
외부의 직선 위주 디자인과 보기 좋게 어우러진다.
이보크의 경우 P250 S는 매립형 내비게이션,
P250 SE 이상부터는 돌출형 PIVI 프로가
적용되는데 이 차량은 SE인지라
다른 레인지로버에서 보던 레이아웃 그대로.
여담으로, 로버그룹 산하 시절부터 랜드로버와 BMW는
꽤나 끈끈한 관계가 이어지고 있고 무려 현재진행형.
신형 레인지로버 보그와 스포츠가 P530 모델에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BMW의 N63 엔진을 공급받는다.
(2022년식 기준)7450만원의 가격표는
아무리 프리미엄 브랜드 출신이라지만
C-SUV에 붙기에는 좀 높은 숫자인데
운전석에 오르는 순간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진다.
우선 시트의 착좌감이 굉장히 안락한데
무작정 푹신하기만 한 시트가 아니라
부드럽고 질 좋은 가죽과 적당한 쿠션감,
폭 넓게 몸을 감싸는 시트의 크기가
한 데 어우러져 편안함을 선사한다.
차급을 나누는 큰 잣대 중 하나가
바로 시트인데, 이보크는 비싼 값을 한다.
심지어 시트는 생긴것도 고급스럽다.
투 톤 내장의 경우 거의 두 체급 위인
기함급 SUV들과 한 판 붙을 정도.
그리고 실내의 향도 동급 차종대비
훨씬 고급스럽고, 머무르고 싶은 향이다.
이보크 P250 SE에는 12스피커 메리디안
사운드 시스템이 기본적으로 적용되고,
인디비주얼 오더로 14스피커
메리디안 서라운드 사운드로 업그레이드 가능.
단 돈 130만원이니 고려해봄직한 내용이다.
그런데 기본인 메리디안 시스템도 훌륭하다.
비슷한 가격대 중에 GV60의
뱅앤올룹슨 사운드 시스템이 이보크보다
스피커의 음압이 높고 꽉 찬 소리를 내지만,
전반적인 소리의 섬세함 측면에서는
이보크의 메리디안 시스템이 압승.
나머지 경쟁차종인 아우디 Q5나
메르세데스-벤츠 GLC,
렉서스 NX보단 훨씬 좋다.
아무래도 차 크기 대비 차량 가격이 있으니.
이렇게 이보크는 탑승객의 오감을
미각 빼고 품격있게 만족시킨다.
베이비 레인지로버임에도.
차를 핥을 순 없으니 미각은 못 느끼지만.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해볼까.
기본적인 시트포지션은 최저로 낮추면
엄청 낮진 않지만, 대시보드의 높이가
체감상 높게 느껴질정도까진 내려간다.
그래도 정통파 SUV 유전자가
베이비 레인지로버일지언정 어디 가진 않는다.
스티어링 휠 사이즈도 차 크기 대비
살짝 커서 본격 오프로더 느낌이 꽤 난다.
재규어랜드로버그룹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인제니움 4기통 가솔린 터보.
P250이라는 트림 이름 답게
250마력의 최고 출력과
37.2kg·m의 최대 토크를 자랑한다.
비슷한 출력대의 경쟁 차종들과
유사한 출력과 토크 수치이다만
실제로 체감되는 출력감은 이들보다 약하다.
전반적으로 물 흐르듯 매끄러운 동작에
좀 더 집중한 경향이 짙은데,
파워풀한 질감은 메르세데스-벤츠 M264가,
부드럽고 크림 듬뿍 얹은 듯한 느낌은
아우디(폭스바겐) EA888이 더 강하다.
파워트레인의 전반적인 평은
두루 무난하고 거슬림이 없이 평온해서
아우디(45 TFSI 차종들)에 좀 더 가깝다.
그런데 아우디는 7단 S-트로닉 DSG를 써서
동력손실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데 반해
이쪽은 ZF의 9단 자동변속기를 사용했어도
변속기에서 출력 손실이 어느정도
체감이 좀 되는 편이다.
차량 성향이나 오너들의 성향 상
문제시될만한 정도는 전혀 아니지만
내 취향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S모드로 주행해도 변속기는 여유를 부리고,
D모드에서는 전반적으로 느긋하다.
꼭 ZF산 변속기라고 만능은 아니다.
최대토크가 굉장히 낮은 1300rpm부터
4500rpm까지 쭉 발휘되는데,
수치가 비슷한 동급 차종들 대비
두둑한 토크가 밀어주는 느낌은 약하다.
감각 자체는 약하지만 가속력이 부족한건 아니라
타겟팅한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춘 것이겠지.
생각보다 꾸준히 속도가 붙는 타입.
BMW의 B48 + ZF 8HP 조합이
효율성이나 성능이나 여러모로 우세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었단 인제니움 엔진은
좀 끗발이 약하지만, 이정도로도 충분하긴 하다.
승차감은 서스펜션 스트로크가 굉장히 긴 반면에
댐퍼의 압력은 꽤나 강하고 빠른 처리가 인상적이다.
그래서 바퀴의 움직임에 대부분의 상황에서
상당히 관대하며 여유가 있다.
어지간한 충격들은 짧게 끝나는 편이고,
실내로 이따금 전달되는 큰 충격조차도
그 형태에 모서리가 없이 둥글다.
SUV지만 세단에 가까운 GLC나
완전히 푹신하고 편안한 승차감의 Q5랑
전반적인 감상이 꽤나 다르다.
사실 Q5랑 이보크랑 서로 맞바뀌어야
브랜드에 걸맞는 승차감이 된다만, 암튼 그렇다.
GV70(ECS 포함)이나 XC60같은 것들은
애초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이보크보다 승차감이 나빠서 아웃.
신기하게도 같은 회사에서 나온
디펜더와는 승차감과 주행감이 완전히 다르다.
디펜더는 배를 모는 것 같이 큰 덩치의 차가
둥실둥실 떠다니며 자잘한 충격을 전부
무시하거나 깔아뭉개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보크는 비교적 젊은 성격에 걸맞게
노면을 다루는 데 조금 더 진솔하다.
대신 고속주행 시 디펜더보다 더 안정적이고,
사실상 메르세데스-벤츠 GLC의 뒤를 이은 2등.
디펜더는 애초에 완전 오프로드 중심의 차량이니
그것도 그러려니. 이보크도 꽤나 인상적이다.
차체의 쏠림(롤의 발생)이 분명 확연하나,
이에 대한 대응을 침착하게 하되
후속되는 차체의 반응이
빠르거나 급작스럽지 않아 기품 있다.
고급차 신분에 걸맞는 주행성이다.
다시 실내로 돌아와서,
선명한 디지털 클러스터와
가죽으로 넓게 장식된 대시보드는
"비싼 차"를 타고 있다는 확신을
탑승객 모두에게 선명하게 전달한다.
파노라마 썬루프의 면적도 꽤 괜찮고,
2세대로 진화하며 길어진 휠베이스가
뒷좌석 레그룸 확보에 대부분 쓰였기에
이제 성인도 어느정도 탈만한 공간이 됐다.
하지만 성인 남성이(애초에 타지도 않겠지만)
장시간 탑승하기에는 여전히 조금 좁아 보인다.
이 차는 와이프가 타고다닐 세컨카에 가까우니
초중등 자녀 학원 하원에 많이 쓰일 확률이 높고
그런 용도라면 이보크의 2열은 충분하다.
이 차로 오프로드에 가보진 않았지만,
제아무리 '베이비' 레인지로버여도
레인지로버 가문의 일원임은 분명하다.
이보크는 최대 530mm 깊이의 수심을
도강할 수 있어 GV80(500mm)보다도 높은 수치.
작은 체구지만, 혈통은 역시 무시 못한다.
그렇지만 사실 이 차를 끌고
오프로드에 가는 고객은 0%에 수렴할 듯.
하지만 하려면 할 수 있다는 것. 이게 핵심이다.
생전 가지도 않을 거면서,
험지 주파가 수월하다는 이유만으로
덩치 큰 SUV를 비싼 돈 주고 사는 이유는
딱 하나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주는 여유.
단지 굳이 안 할 뿐인 것.
이 역시나 고급차의 덕목이다.
아 참, 타이어만 봐도 이보크가 험지에 안 간단 사실을
랜드로버측에서도 알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순정 타이어는 피렐리의 스콜피온 제로 올시즌.
접지력 자체는 SUV용 타이어 치고
나쁘진 않으나, 완연한 스포츠 타이어는 아니다.
그러나 컴포트 성향의 물건이 아니며
오프로드 진입을 감안한 타이어가 아니다.
그냥 어떤 환경이든 무난하게 타고다닐 수 있는
적당한 수준의 타이어. 이보크에 꼭 맞다.
개인적으로 이보다 한 급 낮은
스콜피온 베르데 올 시즌은 정말 안 좋아하는데,
다행히도 스콜피온 제로 올 시즌은
주행 성능면에서 한결 나으면서도
편안함이나 정숙성에서 큰 타협 없다.
그래서 신형 이보크는 결론을 내보자면,
2세대로 진화하며 그 존재감이 확고해진
명망 높은 귀족 '레인지로버' 가문의 막내.
처음 등장했을때는 그 겉모습으로
화제몰이를 했지만 내실이 약했다면,
이제 가문의 구성원으로 확실한 입지를 다져
그 존재감을 자랑할만큼의 능력을 갖췄다.
사실상 이보크도 나이를 먹어가며
모델 자체에 대한 랜드로버측의 해석이
보다 명확해졌다고도 볼 수 있고,
그 결과 이보크는 한결 성숙해졌다.
이제 달리는 성능까지 얼핏 갖췄으니.
그러면서 레인지로버 모델 레인지만의
독보적인 고급감은 여전히 압권이다.
높은 가격표를 처음 보고
이 차를 사도 되려나 망설여진다면
미련 없이 한 번 타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
그저 아기같던 꼬마 왕세자가
이제 어엿한 남자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