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전기차 시대로 바뀌어가면서
이전의 나는 기존 유수의 자동차 브랜드들간의
위계질서와 서열이 뒤흔들릴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던 적이 있다.
고급차의 대명사 메르세데스-벤츠,
벤츠와 판매량으로 엎치락 뒤치락하는 BMW,
멋진 스타일링과 가성비의 아우디.
'독 3사'로 대표되는 이 세 브랜드는
사실상 벤츠 - BMW - 아우디 순의 서열이
적어도 지금까지는 지속되어 왔다.
이 순서대로 할인을 적게 하기도 했었고.
물론 요즘은 메르데세스-벤츠도 할인 많이 함
현대자동차가 전기차에 목숨을 건 것 처럼
아우디도 그간의 훼손된 이미지와
제자리걸음 상태인 위상을 뒤엎으려면
전기차 시장에 이 악물고 달려들어야 하는 상황.
아우디도 최근 기존 모델 네임 + e-tron이라는
희한한 작명 방식과 폭스바겐그룹의 새로운
전기차 전용 플랫폼 MEB(와 추후 나올 PPE)를 써서
전기차 라인업을 확장하고 있는데,
이번 글에서 다룰 건 일찍 나온 'e-tron' 그 자체이다.
메르세데스-벤츠나 BMW와 달리 아우디는
3등 회사답게 네이밍도 정신없는 상태였는데
이 차량도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면서
Q8 e-tron이라고 이제 정리되어 불릴 예정이란다.
생긴걸 보면 Q6 e-tron이 맞는데
이 이트론은 그래서 E-SUV 세그먼트에 위치해
세그먼트상으론 BMW iX나 추후 국내 출시될
메르세데스-벤츠 EQE SUV와 경쟁하는 모델인데
실질적으로나 가격적으로나 적어도 국내에선
제네시스 Electrified GV70의 경쟁 차량.
딱 봐도 정통 SUV보다는 크로스오버 왜건에
훨씬 가깝게 생겼다. 납작하고.
이런 스타일링이 마음에 드는 이들도 있겠지만
정통파(?)인 나한테는 영 꽝이다.
내연기관 Q7과 Q8은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며
듬직한, SUV다운 인상을 과시하는데
페이스리프트 이후부터 Q8 e-tron이라면서
이렇게 왜소한 인상이어도 되나 싶다.
그래서 한 체급 작아보여
Electrified GV70과 나란히 놓고 보면
둘이 동 체급이라고 해도 대부분 믿지 싶다.
이트론은 50 콰트로와 55 콰트로, S
이렇게 세 가지 모델로 나뉘고
다시 일반형과 스포트백으로 생김새가 나뉜다.
오늘 다루는 이트론 55 콰트로는
95kWh 배터리를 얹고 있으며
최대 출력 360마력(부스트 시 408마력),
최대 토크 57.2kg·m(부스트 시 67.7kg·m)
의 성능을 자랑하는 듀얼 모터 사륜 구동.
솔직하게 말해서 그리 좋은 수치는 아니다.
더군다나 공차중량이 2640kg나 되는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차에는 말이지.
성능부터 짚고 넘어가자면
이만큼 돈 받으면서 이렇게나 모자라도 되나
특히나 전기차인데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타는 내내 지속적으로 들었다.
일단 가속력이 실제로 부족한 건 아니지만
(제원상 제로백 6.6초)
체감되는 가속력이 정말 말도 안 되게 답답하다.
내가 어지간해서는 답답하다는 말을 잘 안 하는데
이건 좀 정도가 심하고, 2.6톤의 무게가 큰 짐이다.
다이나믹 모드를 놓고 부스트 모드를 활성화해서
악셀을 꾹 밟아봐도 역동적인 변화는 미미할 뿐.
'꾸준하게 밀어준다'고 포장해주기도 어려울 정도로
체감되는 가속력이 너무 부족하다.
비슷한 출력의 BMW iX xDrive40은
326마력으로 출력은 약간 모자라지만,
최대 토크가 평소에도 64.2kg·m이고
무게도 200kg 넘게 가벼워서
체감되는 가속력과 실 가속이 훨씬 우수하다.
xDrive40은 배터리가 76.6kWh밖에 안 된다고?
iX xDrive50은 111.5kWh를 얹고도
95kWh짜리 이트론 55 콰트로보다
공차중량이 65kg가량 가볍다.
이트론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 수 있는 대목.
무게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이트론은 무거워도 정말 무겁다.
나는 '좋은 전기차는 전용 플랫폼이 필수' 라는
일부 무식한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이지만
이트론의 경우는 전용 플랫폼이 아니라서
이런 심각한 무게와 그에 따른 주행감 손상이 이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뻔 했다.
이트론은 MLB evo를 쓰거든.
그런데 경쟁사인 BMW는 내연기관 차량들이 쓰는
CLAR를 손 본 버전을 전기차에 적용하고 있으면서도
출시중인 전기차 모델들의 완성도가 탁월한데
아우디는 그동안 경쟁사들 대비 열세였던 점이
결국 여기서도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제네시스도 Electrified GV70은
GV70과 동일한 M3 플랫폼을 쓰고도
완성도를 두 세 단계 크게 끌어올렸기 때문에
'전용 플랫폼이 아니다'라는 그 자체는 잘못이 없다.
하기사 그리고 폴스타 2 역시 볼보 차량들과 같이
CMA 플랫폼을 쓰는데 아주 엉망진창이지.
그래서 내가 정립한 새로운 명제는
'전기차의 완성도는 전용 플랫폼이고 나발이고
그냥 자동차 제조사의 역량에 따라 결정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다 타보고 검증한 내가 하는 말은
사뭇 다르게 들리지 않을까.
다시 무게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무게는 당연하게도 가속, 제동, 선회 시
모두 짐이 되는데 이트론은 역시나
무거운 만큼 그 정도가 심하다.
뒷바퀴 근방에 배터리가 많이 실렸는지
차를 돌려보면 그쪽에 지방이 왕창 낀 것 처럼
돌려는 내 의지에 반하는 반작용이 생긴다.
난 개인적으로 후륜의 움직임이
활발한 차량을 선호하기 때문에
이트론은 여기서 크게 점수가 깎였다.
준대형 SUV에 그런걸 요구하는건 말이 안 되지만,
적어도 내가 돌리고자 하는 의도에는 맞춰줄
의사는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페이스리프트 후엔 Q8 e-tron이니
같은 플랫폼의 내연기관 Q8과 비교하면
이트론의 댐퍼가 전형적인 아우디 스타일대로
훨씬 단단하고 차체 롤이 억제되어 있음에도
역동적인 주행감은 Q8이 소폭 낫다.
Q8도 막 짜릿한 그런 차는 아니지만
이트론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뜻.
여담으로, 브레이크 또한
절대적인 성능은 전혀 부족하지 않고 좋은데,
차가 너무 무거워서 초반 미세 제동 시
제동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트론은 사실 이게 문제다.
가속력도 제로백 6.6초면 그렇게 느린 차가 아닌데
차가 아주 갑갑하게 안 나간다는 '느낌'을 주고
멈출때도 제동력이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며
선회 시에도 너무 안 돌아간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는 그렇게까지는 아닌데.
자. 그럼 이트론은 잘못이 없는건가?
애석하게도 이건 전적으로 이트론과
궁극적으로는 아우디의 잘못이다.
'비싼 돈 주고 비싼 차를 왜 사느냐'라는
원론적인 질문에 접근해보자면,
3천만원짜리 차랑 1억 3천만원짜리 차랑
모든 게 4배 이상씩 좋아서
그만한 금액을 지불하는 게 당연히 아니다.
차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막연히 '잘 달릴거야'
하는 믿음과 안정감, 든든한 느낌.
이 모든 것이 종합된 브랜드의
네임 밸류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인데
아우디가 기존에 익히 알려져있던
'기계식 콰트로가 주는 안정감' 혹은
'독일차다운 순수한 기계적인 완성도'를
이트론에서는 찾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럼 딱 한 마디로 귀결된다.
'이걸 이 돈 주고 왜 사?'
난 전기차 시대로 오면서
제일 위험한 회사가 BMW일거라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니 아우디가 제일 위험하네.
듀얼 모터 셋업으로 가면서
이제 너도나도 사륜구동을 탑재하고,
특히나 가변 구동력 분배에 장점을 보였던
BMW의 xDrive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최신 EQ 차량들의
4Matic 버전들이 어떨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
'콰트로'라는 상징적인 아이콘을 지닌 아우디는
이제 제 색깔을 다른 회사에 다 뺏긴 셈이다.
물론 최신 '울트라 테크놀러지가 적용된 콰트로' 또한
기계식이 아니라 전자식이긴 하지만,
전기차에는 다판 클러치같은 물리적인 장치가
사륜 구동을 위해 탑재되는 것도 아니고,
아우디가 내로라하던 특유의 안정감이
전기차에 잘 살아있는 것도 아니다.
콰트로는 결국 허울 뿐인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S-트로닉이 아닌 아우디는 살 필요가 없다'고
계속 주장할만큼 아우디(와 폭스바겐그룹)의
S-트로닉 듀얼 클러치 변속기를 높게 치는 편인데
전기차로 오면서 그것도 이제 없어졌고.
사실상 '소싯적 아우디를 좋아했던 이유'가
전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패밀리 SUV이니
승차감이 좋다면 많은 부분을 용서해줄 수 있다.
특히나 이트론은 승차감이 좋다고
차주들이 칭찬을 많이 한 차량이라
나 역시도 기대를 많이 한 상태.
이트론은 에어 스프링 및 전자제어식 댐퍼가 장착된
주행 모드 별로 상태를 가변 적용하는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다고.... 일단 밑밥을 깐다.
전반적인 승차감을 한 줄 요약하자면
제네시스 G90의 전기차 같은 느낌?
말로만 들으면 명성대로 되게 좋나보다,
SUV인데도 높으신 나으리들 타는 차 수준이라니 싶겠지만
일단 제네시스 G90의 승차감이 그닥 좋지 않거니와
다들 극찬하는 것만큼의 승차감이 전혀 아니다.
에어 스프링(소위 '에어 서스펜션')이 적용된 만큼
노면의 자잘한 요철과 충격은 깔끔하게 없애고
전기차들이 대거 보여주는 전기차 특유의
미끄러지듯 나가는 느낌은 잘 살아있다.
하지만 여기는 방지턱의 나라 대한민국.
댐퍼가 승차감 모드(진짜로 '승차감' 모드다)를 놓아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단단한 편이다.
차가 너무 무거운 상황에 스프링을 비교적
부드럽게 설정하려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듯 한데
방지턱 진입 시 텅 하는 충격이 매우 강하게 들어온다.
그 충격이 별다른 모서리가 없이 둥근 형태인건
아우디가 그간 보여준 모습과 똑같은데,
충격의 강도 자체가 너무 세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승차감 저하가 많이 일어난다.
댐퍼가 컴프레션이 너무 강한데
이걸 조금 풀고 에어 스프링의 강도를
더 올리는 게 궁극적으로 승차감 구현에는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게 개인적인 생각.
오히려 다이나믹 모드와 승차감, 효율 모드 간의
승차감 차이는 그렇게까지 많이 나지 않았다.
주행 성능을 포기할 거면 아예
Q8처럼 완전히 모든 걸 부드럽게 만들던지.
롤이 억제되어 있다고 무조건 주행 성능과 주행감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기에, 적정 선을 아우디 측에서
다시 한번 검토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Electrified GV70은 매끄러운 노면에서는
개인적으로는 이트론보단 좀 더 정제된 움직임을 보이고,
나쁜 노면에서는 이트론보다 실내로 충격/진동이
유입되는 양이 훨씬 많았다.
BMW iX xDrive40은 에어 스프링이 아니고
22인치나 되는 휠을 끼웠는데도(이트론은 20인치)
승차감이 이트론보다 훨씬 좋다.
그 외 기타 다른 부분들은
아우디여서 (개인적으로)아쉬운 요소들이 대부분.
실내 디자인과 버츄얼 콕핏은 이제 지겹기까지 하다.
버츄얼 사이드미러는 난 금방 적응하긴 했지만
대부분 단점으로 받아들일 확률이 높고,
분명 이름은 컴포트 시트라는데
안락한 착좌감보다는 그냥 넓게 받쳐주기만 하는
쿠션도 비교적 단단한 시트도 별로.
난 아우디의 발코나 가죽이
까끌까끌해서 그닥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스티어링 휠도 아우디스럽게 두께가 얇고
아우디는 왜 이렇게 컵 홀더랑 원수가 졌는지
컵 홀더도 사이즈가 작다. 전기차인데?
실내에서 시간을 훨씬 많이 보내는 차량인데?
뱅앤올룹슨 오디오도 차급 치고는 괜찮지만
이름이 주는 감동만큼은 전달하지 못한다.
휠 크게 쓰는 아우디답지 않게 휠 사이즈도
비교적 작은 20인치인데, 그 이유를 알겠다.
이 차는 너무 무거워서 전력효율이 엉망이다.
전비가 너무 안 나와 이 이상의 큰 휠을 끼우면
도저히 주행가능거리가 용납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일단 배터리 스펙이 NCM 6:2:2라 구식에
95kWh(실 가용 용량 86.5kWh) 사이즈인데
전비가 잘 나와야 4.8km/kWh이다.
잘 나왔다는 수치가 한여름에 잰 거고
바닥까지 배터리를 써야 400km을 넘긴다.
전기차를 운용하게 되면 알겠지만
이런 상태면 실 가용구간은 300km 넘기 쉽지 않다.
특히나 이런 가격대와 특징의 차량을 살 가장들에겐
'왜 쓸데없이 불나면 위험하다는 전기차 사갖고
이렇게 기분좋게 놀러나왔는데 시간 낭비하게 만드나'
라고 욕 먹기 딱 좋은 상황.
배터리 용량이 작은 건 아닌데, 전비가 너무 안 나온다.
단순히 출퇴근용으로 살 만한 차량은 아니라서
결국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붕 떠버린다.
무게가 여기서도 발목을 잡는다.
결론.
만년 3등이던 회사가 갑자기 1,2등을 잡는 건
이렇게 판세가 뒤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멀고 어렵고 힘든 이야기.
그나마 3천만원 이상 할인해서
8천만원대로 55 콰트로를 살 수 있을 땐
가성비(??)로 살 만 했다지만,
요즘엔 프로모션이 어떤지 모르겠네.
내가 지난 여름에 타볼 땐 할인 폭이 반토막 났었는데
최근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아우디는 또 제 버릇 남 못 주고 할인 릴레이 한다니
옵션 덜 빠진 차량이면 싸게는 나쁘지 않으나
1억 전후하면 살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트론은 다른 아우디 모델보다
(반도체 부족이라는 핑계로)옵션 삭제가 덜한 편.
반도체가 부족한데 왜 내장 가죽 질이 너프를 먹는건지
알 수 없는 아우디코리아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이 체급 전기 SUV는 무조건 BMW iX.
이제 온라인 에디션 구입도 한결 수월해졌고
iX xDrive50이 이제 하만카돈으로 오디오가
하향됐음에도 오디오 성능이 꽤나 좋은 편이라
돈을 더 주고 무조건 iX로 가는 것이 옳다.
돈을 절약할 것이라면 Electrified GV70.
내가 새롭게 만든 공식이 하나 더 있는데,
'아우디는 6천만원이 분기점'이라는 것.
(실구매가) 6천만원 전후하는 A6 45 TFSI 콰트로까지는
구입 시 만족도가 아주 높은데
그 위로 올라가면 깔끔하게 박살난다.
이트론의 가격이 얼마였더라?
아우디 e-tron 55 quattro
정가 116,504,000원 (- 프로모션 금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