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적엔 자동차를 접하는 매체라면
단연 영국의 < 탑 기어 > TV 프로그램이
보기에도 재밌고 규모에도 가장 컸었다.
지금은 3명의 MC가 바뀐지 오래라
나도 안 본지 오래됐지만,
어린 시절의 내가 재미있게 본 것 중 하난
'Cheap Car Challenge'라고
싼 값의 중고차를 사서 미션을 수행하는,
말 그대로 예능 프로그램같은 컨텐츠.
우리 돈으로 겨우 몇 십 몇 백 만원 수준인
헐값으로 산 차가 고장나고 문제를 일으키며
갖가지 난리를 피우는 일련의 과정들이
지켜보는 과정도 웃겼거니와
언젠가 나도 정말 싼 중고차를 사서
한번 타고다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최근 딱 그런 일이 생겼다.
글에서도 몇 번 강조했고
블로그 이름에서도 강하게 말하고 있지만
나는 1999년생이며, 사실 블로그를 보면
나이 치고는 다들 놀랄만큼 별별 차를
두루 많이 타본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다 쓰지 않은 차들도 수두룩하니.
그래서 갑자기 이런 차를 쓰다니
다소 의외겠다만 타고 다닌 기억이
너무 웃겼기에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어서.
이 차는 2005년식 SM5(EX1) PE이다.
LE, RE는 고사하고 SE도 아닌
제일 기본형 트림이다.
그래서 연식도 연식이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든 게 없다시피하다.
1998cc 4기통 엔진과 자동 4단 변속기,
문짝 4개와 와이퍼 등은 전부 동일한데
PE라서 그게 끝이다.
보통 2세대 SM5를 출고하면
당시에 영업사원들이 이 차의 모태인
닛산 티아나의 테일램프를
서비스 차원에서 많이 달아줬었는데
역시나 깡통이라 그런 서비스도 얄짤 없다.
내비게이션 같은 초호화 장비는 당연히 없고
대시보드에 디스플레이 자체가 없다.
그 말인 즉슨 후방 카메라도 없다.
다행히도 앞좌석 열선시트같은
럭셔리 장비는 장착되어 있는데
특이하게 직물 시트인데 열선이 있다.
보고 있나 올 뉴 말리부
이 차는 어쩌다보니 종종 만나게 되는데
어째 만날때마다 점점 상태가 악화되어간다.
당장 내일 폐차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거의 고장나서 멈춰서기 일보직전의 차량.
그래서 그런지 아무 생각없이 막 타기 좋다.
일단 이 차는 내가 짐작하기로
엔진 마운트와 미션 마운트가 둘 다 가출했다.
엔진 마운트 네 개 중에 두 개가 실종된 듯하고
미션 마운트는 완전히 사라진 느낌.
예전에 페라리 F50이 V12 엔진을
차체에 그대로 갖다붙여 그 진동이
운전자 등으로 전부 전달되는 걸로 욕을 먹었었는데
심지어 달리는 데 모든 걸 맞춘 페라리조차
그정도 진동이면 욕을 먹는데 이 차도 만만찮다.
엔진이 회전하면서 좌우로 흔들리는게
고스란히 앞좌석으로 전달되어
생동감이 끝내준다.
이걸 타고다녀도 멀쩡한 날 보면서
원래도 내가 NVH에 예민하지 않단걸 알았지만
정말 소음과 진동에 무디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를 알아가게 만드는 차. 자아존중카.
「 이태리 명車 페라리 게 섯거라, 뉴-SM5 출시 ! 」
또 미션 마운트가 잠적하다시피 해서
크리핑시 엄청난 진동이 트랜스미션 터널로부터
덜덜덜덜덜덜 전해지기 때문에
컵홀더에 꽂은 음료수도 즐거운지 춤을 춘다.
최근 나오는 DCT 탑재 차량 중에
하드코어한 성향의 차량도
이 정도 수준의 진동이 변속기로부터
운전자에게 그대로 느껴지는 경우는 없는데
레이싱카의 DNA를 숨기지 못한 걸까.
변속 충격은 너무 당연하게도 있다.
다만 최근 차량들에서 변속 충격을 꼽으면
고단 고부하 주행 시 킥다운이나
특정 단 수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사례들인데
이 차는 변속을 할 때 마다 변속충격이 생긴다.
스포티한 수준을 넘어서서 이건 하이퍼카다.
아반떼 N의 N DCT가
N 파워 시프트 기능 덕분에
변속 시 고의적인 변속충격을 만들어
역동적인 주행감각을 구현하는데,
이 차가 한 다섯 수 정도 위 인 듯 하다.
2000cc급에 4도어니 나름 동급.
미션 오일 교환이 필요한 듯 한데
이런 차에 돈을 더 들인다는 것 자체가
아무래도 다소 망설여지는 일.
이 아이신 4단 자동변속기는
2 -> 3단 변속 시 변속충격이 있는 것으로
다른 르노삼성 차량 오너들도 많이들 이야기하는데
이 차는 그걸 뛰어넘어 모든 변속이 유난이다.
파워풀하고 스포티한 감각이 끝내준다.
4단 자동변속기라고 하니
예전에 우리 집에 있던 SM520V가 4단이었는데
이렇게 다단회가 전혀 되지 않은 변속기는
캐스퍼 말고는 근래에 타본 적이 없는 듯 하다.
그래서 100km/h에서 회전수가
무려 2500rpm이나 된다.
너무한 비교긴 하지만 요즘 9G-트로닉의
메르세데스-벤츠 E350d가 동일 속도에서 1100rpm.
SM5는 항속주행 시에도 높은 회전수를 사용하여
운전자가 튀어나가고 싶을 때를 대비해
차가 언제나 기다려주고 있는 셈이다.
요즘 차들이 초반 최대 가속력을 위해
회전수를 띄워주는 런치 컨트롤을 갖췄다면
이 차는 달려나가려는 제어 시스템이 항시 작동.
SM5의 S가 스포츠인줄 누가 알았겠어.
환경에 목숨 건 오늘날이랑 달리
옛날이란 이런 시절이었지.
이 차는 또 휠 스피드 센서가 맛이 갔는지
속도계와 실제 속도의 오차가 매우 심하다.
계기판이 100km/h를 가리키는데
스마트폰의 GPS는 83km/h라 나와
일반적인 차량의 두 배 가량의 차이가 난다.
난 계기판에 135km/h라 찍혀있는데
체감 속도는 105km/h 정도라
S-클래스의 라이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실제로 GPS상 112km/h.
고급 승용차다운 면모를 과시하는 줄 알았는데
속으로 내심 조금 아쉬웠다.
앞좌석 열선시트라는 호화 장비는
운전석쪽 버튼은 점등은 되나 고장났고
조수석쪽 버튼은 부러져서 작동이 안 된다.
따뜻한 시트로 인한 졸음 운전을
막기 위한 최첨단 안전 장치이다.
심지어 버튼의 디자인이 최근 르노삼성 차량과
거의 차이가 없어 모던한 감성이 느껴진다.
스티어링 휠에 버튼이 없는 모습을
도대체 얼마만에 보는지 모르겠다.
도요타의 GR86도 이제 스티어링 휠에
버튼들이 장착되는 2022년을 살고있는데
이정도면 사실상 포르쉐 911 GT3나 다름없다.
위에서 언급한 레이싱카 DNA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심지어 포르쉐보다 한 술 더 떠서
금속 룩 장식조차 하나 없이 디자인이 민짜다.
버튼리스 디자인도 그렇고
역시 진정한 퍼포먼스카는 기본기에만 집중.
요즘 정신사납기 짝이 없는 신차들의
각종 조작기능들에 반기를 드는 반항아적 스타일이다.
운전자는 운전에만 집중하라는 따뜻한 배려.
진심으로 눈물겹다.
이 차는 오디오도 슬슬 맛이 가려고 해서
아예 포기하고 네이버 클로바 프렌즈를 갖다놨다.
이 고급 모노 오디오는 웅장함이나 시원함은 없지만
창문을 내리면 행인들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강력한 출력은 갖추고 있다.
음악이 한 곳에서만 나오니
창 밖의 소리가 비교적 더 잘 들려
안전운전에도 큰 도움이 된다.
니로 시승기에도 적었지만
내가 "힘이 부족하다"라고 표현하는 차는
그리 많지 않은데 이 차도 놀랍게 해당된다.
집에 있는 QM6 GDe가 동 배기량에 144마력.
이 차는 제원상 140마력이라 적혀있다.
연식이 상당하니 140마리의 말 중 상당수가
자유를 찾아 도망갔을 확률이 높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정말이지 안 나간다.
3단이나 4단이 걸려있는 상태에서
악셀을 절반 이상 밟아야지 겨우 차가 움찔하고
풀 악셀을 내리밟아야 가속같은 움직임이 나온다.
자연흡기 엔진답게 저회전 영역에선 힘이 너무 없다.
저회전 토크의 결핍으로 늘 지적받아온
도요타 86이 떠오르는 느낌이다.
SM5 역시 드라이버와 함께 성장하는 차.
엔진 출력도 세월에 따른 저하가 있겠지만
변속기 역시 체감출력 폭락에 일조한다.
변속기 제조사가 아이신이니
이상한 물건이 달려있는 건 아닌데
변속기 로직이나 직결감이 영 꽝이다.
변속충격이 빈번하지만 꽉 물린 느낌은 전혀 없고
반대로 매끄럽고 부드러운 변속감도 해당되지 않다.
매끄러운 게 아니라 미끄럽고 헛도는
신박한 새로운 장르의 변속감.
차는 오래 됐는데 주는 느낌은 신선하기 그지 없다.
변속기가 까먹는 출력 역시 상당하게 느껴진다.
하기사 티볼리도 아이신제 변속기 쓰는데...
후방 카메라가 없는 차는
면허 처음 따고 하와이에 가서 탄 액센트와
한국으로 귀국한 후 아버지한테 연수 받으면서
잠시 타고다녔던 745i 이후로 4년 만이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이면 내가 갓 성인이 된
스무 살 당시의 파릇파릇한 내가 있는데
추억을 회상하게 하는 책갈피같은 차다.
'뉴트로' 바람이 한동안 불다 사라졌는데
골동품같은 이 차를 오늘날 타는 것 자체가
진정한 의미의 뉴트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차 자체는 옛날 차라 차 폭이 좁아서
후방 카메라가 없어도 사실 별 문제 없다.
차 폭이 겨우 1785mm로
아반떼(CN7)보다도 40mm나 좁다.
그리고 서라운드 뷰가 판을 치는 2022년에
나는 후방 카메라가 없는 차로 운전을 시작해서
안 보고 주차하는게 습관이 들어서 그런지
있으나 없으나 지금도 아무 생각이 안 든다.
요즘은 전부 다 전자식 파워스티어링을
연비 때문도 있지만 반 자율주행때문에 쓰는데
이 차는 유압식 파워스티어링이다.
포르쉐 911이 991부터 전자식 파워스티어링이라
클래식 911 매니아들한테 바가지로 욕을 먹었는데
그 분들이 SM5를 타면 될 것 같다.
유압식 파워스티어링이라고
좋지만은 않다는 걸 알려준 차가
딱 두 대 있는데, 바로 얘랑 모하비다.
이 차의 핸들링은 생각보다 나쁘진 않은데
요즘 세상에 조향감 셋팅을 못하는 회사는
사실상 쌍용 빼고(그마저도 렉스턴은 좋다!) 없으니
유압식이라고 특출난 건 전무하다 봐도 된다.
그나마 장점인건 오늘날 현대기아차 중
C-MDPS를 적용한 차량들 특유의
순간적인 답력 딜레이 같은 게 없다는 것.
차 급과 가격을 생각하면 선방한 것이다.
소싯적 고급차의 상징인 풋 파킹 브레이크 역시
고급 승용차답게 빠지지 않고 있다.
당기는 방식의 사이드 브레이크였으면
못 배운 친구들이 뒷바퀴를 잠궈가며
험하게 타는 상황이 연출됐을텐데
고급차 다운 방식이라 품격이 넘쳐흐른다.
이 차에는 16인치 알루미늄 휠과
알루미늄 키킹 플레이트라는 35만원짜리
초고가 옵션이 장착되어 있다.
스포크 갯수도 무려 11개나 돼서
5스포크짜리 제네시스 G80의 20인치 휠을
사뿐하게 비웃는다. 스포크 갯수론 완승.
휠 스포크 갯수가 사실상 고급차의 계급을
판명하는 잣대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지 않나.
이런 고급 옵션을 선택했기에
11만원짜리 불소 도장은 출고 시 패스.
그래서 외판의 상처로부터 슬슬 녹이 올라온다.
클래식 카가 외관이 완전 멀끔하면
차주의 사랑을 받은 티는 나겠지만
클래식카다운 노땅 느낌이 전혀 없는데
이런 자잘한 녹이 꽃처럼 피어나는 중이라
마치 외관만 둘러봐도 봄나들이를 온 것 같고
클래식카 반열에 접어든 차령답게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풀풀 난다.
4단 자동변속기 덕분에
스포츠성에 어울리는 먹성도 갖추었는데
공인연비가 분명 복합 10.8km/l이나
세월이 꽤 흘러 연비 저하가 상당하다.
그러나 푸틴 이 호로잡놈 덕분에
미친 고유가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
이대로 물러설 내가 아니지.
최신 차량에 정차 시 자동으로 작동되는
ISG가 있다면 우리에겐 손이 있다.
번개보다 빠른 손이 움직여서
주황불에 슬슬 서기 시작하면
바로 시동을 끄고 중립에 놓는다.
이 정도 속도면 화투 치다 밑장 빼도 안 걸린다.
앞서 말한 심한 속도계 오차 덕분에
계기판상으로 규정 속도에 맞춰 주행하면
실 주행속도는 한참 낮아
체감 연비가 크게 향상되는 효과가 있다.
안전 뿐만 아니라 환경까지 생각하니
더불어 사는 세상의 일원으로서 책임감이 느껴진다.
심지어 내 주머니 사정까지 챙겨주는
이런 따뜻한 차가 어디 있겠는가.
사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천천히 다니진
내 운전 스타일상 않았는데,
717km 누적 연비가 13.54km/l로
나름 선사시대 유물 치고는 잘 나왔다.
아무리 힘이 없는 차라지만
4단 자동변속기에 16년 된 차라
끽해봐야 10km/l 선이 간당간당할 줄.
아마 요즘 나오는 중형차로
이런 짓을 했으면 2000cc 가솔린이어도
대략 15-16km/l 정도 나올 것 같다.
최신 보조장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혼자 타고 간 것이 아니라
조수석에도 사람이 타고 있어
커피가 마시고 싶다던지 하는 긴급 상황에는
옆자리 사람이 핸들을 직접 잡아주는
수동 차로유지보조도 있다.
요즘 쉐보레 신차들은 차선이탈방지만 있고
차선 중앙을 유지하며 가는 차로유지보조는
6천만원이 넘는 트래버스에도 없는데
고급 승용차답게 16년이나 세월이 흘렀음에도
시대를 앞선 보조 장비들이 달려 있다.
심지어 평소에 마시던 스타벅스 커피가 아니고
편의점에서 산 플라스틱 병에 담긴 커피는
운전중에 따서 마시기가 어려운데,
옆 사람에게 맡기면 커피까지 따서 준다.
4차산업혁명인공지능AI메타버스 시대답게
이제 차가 커피도 따주는 세상이다.
세상 참 좋아졌다. 좋은 시절이다.
완전 깡통인 PE 트림인데도
사이드미러가 전동으로 접힌다.
최신 머슬카인 카마로도 안 되는 건데
역시 고급 승용차는 세월을 앞서가도 한참 앞서간다.
운전석 착좌감이 처음 앉았을 때 조금 묘했는데
놀랍게도 럼버 서포트가 있다.
2006년식 중형차에 럼버서포트라니
요즘 제네시스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깡통 트림이라 외부 도어핸들에
잠금 해제를 위한 열쇠 구멍이
조수석 쪽에 없고 운전석 쪽에만 있다.
갑자기 어떤 괴한이 찾아와서
운전석에 타려는 나한테서 열쇠를 강탈해
조수석쪽으로 빠르게 도망가
문을 열고 다시 잠궈버릴
기상천외한 케이스까지 미리 예상하고
사전에 차단하려는 최첨단 보안장비이다.
소싯적 "절대 도난이 불가능하다"던
레이저-컷 키를 채용한 메르세데스-벤츠조차
한 수 배우고 가야했을 정도로 진보했다.
2006년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걸까?
읽으면서 눈치 챘겠지만
위의 내용은 다 돌려까는거다.
그런데 정말 진심으로 싫었다기보단
이런 아무것도 든 게 없고
곧 멈춰서서 견인해야할 것 같은
이 차를 종일 타고다니는게
예상외로 신선하고 재밌었다.
최근에 각종 옵션이나 안전장비가
도배되다 못해 넘쳐흐르는 차들만
주로 타고다녀서 그런지
쓴웃음과 헛웃음도 많이 포함됐지만
계속 웃음이 나고 나름 신이 났다.
막 타기 좋다고 글 서두에 썼지만
막상 또 죽을 것 처럼 하면서 굴러가긴 굴러간다.
최신 모닝이나 레이, 티볼리 같은걸 타느니
차라리 이 차를 타고 다니겠다.
여행 가서도 고생한 기억이
나중에 돌아보면 더 강하게 기억 나고
미화되어 웃으면서 말할 수 있듯이
이 차도 타고다니는 동안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고
고생까진 아니지만 신경 쓸 게 많았는데
그래서 더 재미있고 나중에도 생각나겠지.
꽤 인상깊은 하루였고
그 하루의 주인공이 바로 이 SM5였다.
또 이 차가 한 가지 확신을 준 게 있는데,
역시 차급과 배기량은 영원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