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블로그에다 여러 차례 밝혔듯
난 내 주변에서도 유명한 메르세데스-벤츠빠.
벤츠 운전석에 앉으면 심신이 편안해지고
세 꼭지 별을 보면 당면한 걱정도 잊게 되는,
이 회사에 미친 사람이란 말이지.
그런 와중에 이번에 타고다닌 SL.
현재 판매중인 7세대 SL(R232)보다
한 세대 전인 6세대 모델이다.
원래 이거 탈 게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그리고 이 차는 SL 350이어서,
국내에는 판매되지 않은 모델.
R231 SL의 최초 출시 당시엔
한국은 SL 63 AMG만 출시되었고,
그 후 SL 400이 출시되었기 때문에
SL 350은 대한민국에 없는 차.
한국에 출시되지 않은 차량도
SL 350.. 뭔가 막 엄청 끌리는,
꼭 타봐야겠는 차는 아니었는데
정말 어쩌다보니 타게 되었다.
타기 전까지의 생각은 이러했다.
타기 전까지는. 타기 전까지는.....
그런데 막상 함께 시간을 보내보니
이 차는 내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있는
진정한 '메르세데스-벤츠'의 모습을
매 순간 적나라하게 보여주더라고.
그래서 SL 350을 타며 내가 왜
메르세데스-벤츠를 주구장창 빠는지,
점점 망가져가고 있는 회사임에도
아직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재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 각고의 고민과 검토 끝에 다다른,
SL 350이 제대로 다시 알려주는
메르세데스-벤츠와 사랑에 빠질 이유
지금 바로 깊게 파헤쳐보자.
우선 첫 순서는 늘상 하듯이 디자인.
신차 출시 당시 6세대로 진화한 SL은
분명 기술적으로는 진보했지만,
외관상으로는 딱히 발전이 있었는지
잘 알기 힘든 애매한 디자인이었고
지금 봐도 정말 멋지거나
SL이라는 차량에 걸맞는
우아하되 역동적인 형태인가
하면 그것도 딱히 아니었다.
얼마 전 별세하신 브루노 사코의 전설적인
쐐기형 디자인을 입었던 4세대(R129)와
스티브 잡스도 탔던 걸로 유명한,
지극히 벤츠다운 디자인의 5세대(R230)
이 두 세대를 거치면서 눈이 너무 높아져
어지간한 외모로는 성에 안 차는 상태.
이 글의 주인공인 6세대(R231)은
그런 하늘 꼭대기에 가 있는 기대치를
만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었지.
지금 봐도 마찬가지인데,
또 5세대(R230)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은
난데없이 ㄴ자형 헤드램프를 도입해서
난 좀 마음에 안 드는지라 걔보단 낫다.
그러니까 생김새로는 순서를 매기면
R230 > R129 > R231 > R230 F/L > R231 F/L
이렇게 내 마음 속에 자리잡아 있음.
최신 7세대(R232)는 S-클래스(W223)의
디자인 큐를 그대로 컨버터블에 녹여
난 되게 마음에 들지만 SL다운 외모는
약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미모 대결에서 어쨌든 이 차는 3위.
딱 중간. 미스 코리아 미.
자꾸 보다보니 앞은 이제 맘에 든다만
뒤는 여전히 썩 내키지 않는 외모다.
좀 더 상하를 두껍게 디자인해서
고급차다운 부피감과 포스를 과시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전면은 그런데
후면은 그렇지 못하니까 약간 아쉽.
반면에 삼각형 테일램프는 너무
꼭짓점이 뾰족해보이고 날렵해보인달까.
균형감 측면에서 그닥 좋은 점수 주기 어려움.
실내로 자리를 옮겨보면,
메르세데스-벤츠 내의 타 차량이 즉각 떠오름.
바로 SLS AMG. 누가 봐도 SLS다.
터빈 모양의 송풍구와 낮게 착 깔린
수평형 대시보드 및 공조 레이아웃까지.
이 차량의 메인 디자이너가 SLS도 그려낸
마크 페더스턴이라는 사람인데,
그 흔적이 고스란히 SL에도 남아 있다.
실내 디자인은 그래서 지금 봐도 참 멋짐.
특히나 SLS는 슈퍼카이기 때문에
각종 실내 내장재를 탄소 섬유 혹은 알루미늄
둘 중 하나로 꾸민 데 반해 SL은
럭셔리 오픈 톱 GT 차량이기 때문에
요즘 보기 힘든 우드 트림으로 살뜰히 꾸몄다.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몇 년 지난
2025년 오늘날 이 차량의 실내를 보아도
촌스러움따위는 일절 느껴지지 않으니
실내 디자인은 정말 잘 됐다고 볼 만 하다.
이전 세대(R230)의 원형 테마가 주인 실내가
약간 더 클래식한 맛이 있긴 하지만,
그건 20년이나 지나서 그리 보이는 것일수도.
10년 좀 넘은 나이로는 '클래식'카는 아니잖아.
SL 350의 이름에서 'SL'도 중요하지만
'350' 역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한다.
앞서 밝혔듯이 SL 350은 대한민국 미출시.
350이 의미하는 파워트레인은
3498cc 자연흡기 V6 엔진에다가
7G-트로닉 플러스 변속기의 조합.
이 엔진의 코드네임은 익숙한 M276으로,
오늘날 널리 쓰이는 중인 M256의 이전작.
우리나라에 수입된 SL 400은 이 엔진에서
배기량을 500cc가량 줄인 다음
트윈 터보를 추가로 붙인 놈이 달리는데
그 M276 DE30 LA는 나 아직 경험 전이라
둘이 비교해서 어떻다 말하긴 좀 어렵지만
이 자연흡기 M276 DE35는 정말 좋다.
이건 지지난세대 E-클래스(W212)의
페이스리프트 모델 E 300에
동일하게 얹힌 엔진이기도 한데,
거기선 252마력이란 출력을 내지만
여기선 출력을 훨씬 더 쥐어짠 편.
SL 350의 M276이 내는 힘은
최고 출력 306마력 @ 6500rpm,
최대 토크 37.7kg·m @ 3500 - 5250rpm.
생각보다 자연흡기 차량 치고 최대 토크가
꽤 낮은 곳에서부터 꾸준하게 나온다.
이때만해도 벌써 이만한 배기량의
자연흡기 엔진을 얹은 경쟁 차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닛산 370Z랑 비교하면
닛산의 VQ37VHR는 333마력을 내지만
최대 토크는 37kg·m @ 5200rpm.
200cc가량 더 작은 엔진임에도 불구하고
M276이 최대 토크 수치도 높으며
발생범위도 한참 더 넓은 편.
독일의 우수한 기술력을 어필하려는 게 아니라
요즘에는 워낙 전동화 기술 및 과급기와
엔진과 관련된 발전된 신기술이
원체 많이 투입되어 있어서 SL 350의
수치가 그닥 인상깊지 않을 수 있지만,
이 당시만 해도 이 정도면 상당했다는 거.
특히나 M276 DE35는
언더스퀘어 엔진이라 보어가 크고
스트로크가 짧은 편이라 엔진 회전수를
더 높게 쓰고싶게 유도하는 그런 물건.
보어 x 스트로크가 92.9 x 86 (mm).
하지만 실제로 이 엔진의 최고 회전수는
6900rpm이라서 그렇게 높진 않다.
왜냐면 얜 방금 들어준 수치에서 대략 알 수 있듯이
중고회전 영역에서 이미 최대 토크를 내기 때문에
너무 고회전까지 돌릴 이유가 하나도 없거든.
이 엔진은 메르세데스-벤츠 내
타 차량과 돌려쓰는 엔진이기도 하기에
엔진이 너무 고회전 지향이면
저회전 토크가 부족해서
마치 차가 힘이 없는 듯 느껴져서
출력과 실용성의 황금 밸런스를
잡고자 했던 노력이 보인다.
다만 요즘에는 저회전 토크를 위해서
롱스트로크형 엔진으로 가는 게 거의 뭐
안 하면 이상한 것 처럼 너도나도 적용 중.
이때만 해도 숏스트로크형 엔진이지만
배기량을 크게 써서 해결을 해버렸네.
요즘 세상엔 더하지만, 이때도 이미
3500cc급은 굉장히 큰 심장이었다니까.
배기량 큰 숏스트로크 엔진의 극단이
페라리의 엔진들 아닌가? 너무 좋아.
M276이 들려주는 소리와 회전 질감은
정말 예상을 벗어나게 너무 좋더라.
M276은 V형 6기통이고,
뱅크각이 60도이기 때문에
구형인 M272의 90도보다 좁힌 것.
그래서 그보다 좀 더 매끄럽고
갸르릉거리는 특유의 음색이 있는데,
이 차 터널에 집어넣고 풀 악셀 밟아보면
포르쉐 후려칠만한 놀라운 소리가 남.
포르쉐의 플랫 식스와 유사한 톤이지만
조금 더 매끄럽고 기름칠한 느낌?
기계적인 거친 음을 살짝 줄이고
시원하고 부드럽게 쫙 뻗는 감각이 일품.
메르세데스-벤츠란 브랜드에도
이런 회전 질감과 소리가 어울려.
난 그동안 지난 세대 E-클래스,
E 300이 당시 신형(W213)으로 거듭나며
구형(W212)의 이 M276을 버리고
M274라는 직렬 4기통 터보가 된 게
어마무시하게 까이는 게 이해가 안 됐는데
M276을 경험해보니 비로소 좀 알 것 같다.
M276에서 M274로 내려가면....으음....
나 6기통 별로 안 좋아하고 가급적
이런 차엔 엔진 무게 줄이기 위해
작은 엔진 달고싶어하는 편임에도
안되겠네. 드디어 나도 '아쉽다'로 의견 변경.
현행 최신형 E 300(W214)의 M254는
갈갈거리는 거친 음색이 좀 줄어들고
마일드 하이브리드의 도움도 받아서
큰 불만이 생길 정도가 아니게 됐지만
이제서야 나도. M276을 원함.
다만 M276은 고질병이 있고
이전의 M272는 포트분사식이었는데
이때부터 직분사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중고차를 구입하거나 이미 구입해서
오랜 기간 유지중이면 주의가 필요함.
인젝터 고장나는 문제는 고급휘발유만 주유 시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단 말도 있는데,
중고차를 구입하면 주유 히스토리를 알 수가 없음.
그리고 캠 포지션 센서와 캠 마그넷 누유로
새어나온 오일이 ECU까지 타고 올라가는
거의 결함 수준의 문제는 뭐 할말하않.
엔진은 예상외로 정말 마음에 들었지만
이게 내 차가 아니기 때문에 맘에 든 것.
내가 중고차를 구입한다 치면
M272가 탑재된 더 구형 모델로 봐야지.
M276은 남의 차로만 경험하세요.
SL 350에 들어간 7G-트로닉 플러스는
악명 높은 메르세데스-벤츠의 7단 자동변속기의
개선판? 혹은 2세대 버전이라고 보면 될 텐데
초창기 7G-트로닉에 비해 토크 컨버터의
마찰을 줄이는 등의 하드웨어 개선이 이뤄져
미션오일도 다른 종류를 사용한다.
7G-트로닉에 대한 악평이 원체 많아서
각오를 하고 탔다만, 악명만큼은 아니었다.
최근의 벤츠 9G-트로닉이 기분탓인지
한 작년? 그 정도를 분기점으로 다시
변속 충격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서
7G-트로닉 플러스라고 해서 그 정도와
크게 차이나지 않을 정도의 품질이었음.
변속 충격이 분명 간헐적으로 올라온다만
이게 주행 시 대단한 불편함으로 다가오나?
그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된다.
그것도 그렇고, 나는 원체 예민하니까
내 블로그에다가 차의 아주 사소한 부분들까지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건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그런거에 무디더라고.
분명 난 변속 충격이 명백하게 느껴졌는데
조수석 탑승객한테 물어보면 '무슨 충격?'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음.
그런 잣대로 보았을 때 7G-트로닉 플러스는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9G-트로닉하고 구조가 얼마나 다른지는
난 잘 모르지만, 변속감 자체는 꽤 차이남.
9G-트로닉은 내가 늘상 말하는
'볼펜의 볼이 굴러가는 듯한 매끄러움'이
특징인 변속기인데, 7G-트로닉 플러스는
오히려 생각보다 오일 압력을 높게 쓰는지
좀 딱딱 깔끔하게 토크 컨버터를 붙이더라.
아니면 이 차량이 SL이기 때문에
다른 메르세데스-벤츠 승용차들과는
차이가 있는 것일수도 있음.
변속 속도는 아주 광속은 아닌데,
토크컨버터식 자동변속기 치고는 나쁘지 않음.
메르세데스-벤츠의 승용차들보다는
그래도 SL이라고 조금 더 공격적으로,
빠르게 변속되게 프로그래밍됨.
SL 350이라는 이름 중에서
350에 대해선 설명을 마쳤는데,
그럼 SL이라는 차량은 도대체 뭘까?
SL은 역사가 오래된, 유서깊은
메르세데스-벤츠의 최고급 컨버터블.
사실 SL이라는 이름이 처음 붙은 건
1950년대에 등장한 레이스카인데
오늘날에는 장르가 살짝 다른 차다.
SL의 이름은 'Super Leicht'라는 뜻으로
엄청 가볍다는 말. 슈퍼 라이트.
메르세데스-벤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많은 이들에게 S-클래스지 레이싱이 아닐테지만
메르세데스-벤츠는 이미 1950년대에,
그러니까 대한민국에 자동차라고는
전쟁용 지프밖에 없던 수준이었던 시절에
3000cc로 215마력을 내면서
영원히 그 힘을 낼만큼 무식하게 튼튼한
엔진을 제작해서 레이싱카에 얹었음.
그리고 그게 오늘날 판매중인 SL들의 전신.
300SL에 얹힌 M198이란 엔진은
레드라인이 6000rpm으로 정해져있는데,
오늘날의 엔진들을 생각하면 낮은 회전 한계지만
거기에는 메르세데스-벤츠의 의도가 숨어있다.
1959년에 만든 300SL의 엔진을 떼서
계속 엔진오일과 휘발유를 무한정 공급해주면
2025년 오늘까지 6000rpm으로
계속 회전할 수 있는 미친 물건이기 때문에.
거기다 M198은 세계 최초로
오늘날 GDI라고 흔히들 부르는
가솔린 직분사 방식을 도입한 엔진.
저런 물건들이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에 나왔다는 게 믿어지나?
그런 레이싱 혈통을 물려받은 게 SL.
근데 SL은 초대 300SL 이후 2세대부턴
전 모델이 쭉 럭셔리 쿠페 혹은 컨버터블.
분명 시작은 경주용 차량을 도로에서도
탈 수 있도록 바꿔놓은 차량이었는데
그 뒤부턴 세상 살 맛과 폼 좀 나는
부르주아들을 위한 고급 차량이 됐음.
그러니까 SL은 레이스 출전용 차량으로 시작해
부자들을 위한 그랜드 투어러로 명맥을 이음.
뱃지를 경주마에서 세 꼭지 별로 교체한
페라리의 V12 차량들과 컨셉이 동일함.
SL도 현재 판매중인 7세대는 V8이 최고봉인데
이때까지는 V12를 얹었으니까(SL 65 AMG).
6세대 SL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지붕이 하드탑이라는 것.
4세대 모델(R129)을 제외하고는
SL은 그간 계속 지붕도 특색 있었음.
1세대는 쿠페 버전이 걸윙 도어,
2세대와 3세대는 '파고다 톱'이란
납작하고 각진 형태의 지붕을 지녔고
5세대와 이 차인 6세대는 하드탑.
7세대인 메르세데스-AMG SL이 되면서
SL은 다시 소프트탑으로 돌아갔는데,
뭔가 개성이 없어진 것 같아서 약간 아쉽.
SL의 하드탑은 정차 상태에서만
개폐가 가능해서 약간 불편.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는 게,
이 차는 하드탑인걸로도 모자라서
바리오 루프(vario roof)까지 달린 하드탑이라
톱 자체의 무게가 상당하기 때문에
주행 중에 바람을 맞으면서 개폐 시도하면
경첩에 무리가 갈까 주행 중 조작은 막은 듯.
구형 SL들과 동일하게 이 차는 탑 개폐를
트렁크 바닥에 위치한 유압 펌프가 작동시키는데
이게 여는 과정에 비가 거기로 유입돼서
펌프에 손상이 가게 되면 지붕 개폐가 안 됨.
중고로 SL 구입할 때 필수 체크사항.
방금 말한 바리오 루프라는 게
옵션 이름으로는 매직 스카이 컨트롤.
이 차는 지붕이 열리는걸로도 모자라
지붕 자체도 유리로 되어있어서
지붕을 닫고도 개방감을 꽤 누릴 수 있고
그 지붕의 유리의 투명도를 조절할 수 있어
천장을 어둡게 하고 싶으면,
하늘에 꼴보기 싫은 사람이 보이면
보이지 않게 만들 수도 있는
지붕 관련해선 업계 최고의 차량.
요새 포르쉐도 이 방식의 고정식
글라스 루프를 타이칸 등에 도입했는데
이걸 십 몇년 전에 이미 채택한
메르세데스-벤츠는 그야말로 와...
특이사항으로는 지붕 닫은 상태에서
매직 스카이 컨트롤 On(밝아진 상태)로
지붕을 열면 이 기능이 꺼진 다음 열림.
이 기능은 메모리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지붕을 열었다 추후에 닫아도
지붕이 닫힌 뒤 다시 매직 스카이 컨트롤 On 되며
지붕 유리가 밝아지면서 탑 개폐가 마무리됨.
하드탑의 장점은 아무래도
자동세차 그냥 돌려도 상관 없고
세월이 많이 지나도 잡소리나 파손의 우려가
소프트탑보다는 현저히 덜하다는 거겠지.
실제로 내가 타고다니는 동안 이 SL은
실내 차폐도 훌륭하게 했고 잡소리도 없었음.
단점이라면 루프가 무겁다는 거.
스포츠카에서는 아무래도 지붕을 열었을 때
운전자의 어깨선 수준의 높은 위치에
철판(과 유리) 뭉치가 자리한다는 게
코너링 성능 확보엔 도움이 안 됨.
그리고 트렁크 공간을 소프트탑보다
훨씬 많이 잡아먹는다는 것.
허나 SL은 쉽게 물러설 차가 아닌데...
이런 부분이 내가 메르세데스-벤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요인들.
"지붕이 그냥 열리면 그만 아니야?"
이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고.
지붕을 닫고도 개방감을 누리도록
지붕조차 파노라마 글라스로 만들고
그러고 또 어둡게 하고싶을까봐
유리의 명도를 조절할 수 있게 하다니.
'굳이 이렇게까지씩이나 해야 할까'
싶게 만드는 게 본디 메르세데스-벤츠.
오버엔지니어링의 정석.
SL은 지금도 그렇지만
이 차가 출시되던 2013년에도
아무나 탈 수 있는 차가 아니었다.
2013년 당시 1200만엔짜리 차량.
12년 전에 1억 2천짜리 차라 생각해봐.
심지어 승용차나 SUV도 아닌
문 두개짜리 차가!! 이 가격이라고!!
쉽사리 고를 수 있는 차가 아님.
오늘날 포르쉐 카이엔의 시작 가격은
1억 3천만원을 훌쩍 넘는데,
그땐 카이엔의 시작가가 9천만원 미만.
그렇던 시절에 세 꼭지 별을 단
문 두개짜리 차량이 1억 2천만원.
럭셔리 컨버터블 그 자체.
유럽 출신 럭셔리 컨버터블들을
간단하게만 짚고 넘어가보자.
혹시 메르세데스-벤츠가 독일차라는 거
모르는 사람이 설마 있을까?
있다면 지금 알아두길. SL은 독일차.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외제차인
독일차와 상반되는 아이들,
영국차 / 이태리차와 맞붙여보면
독일차는 정말 천사나 다름이 없다.
컨버터블 장르가 태어난 곳은 영국.
1년에 거의 364.9일동안 비가 내리는
영국이 뚜껑 열리는 차들을 먼저 만들고
세그먼트를 확립했다니 의아하겠지만
이런 컨버터블이 본격적으로 팔린 건
영국산 로드스터들이 보급되면서부터.
그러나 시작을 영국인들이 했다 뿐이지,
막상 만드는 거 보면 독일인들이 훨씬 잘해.
그보다 더 잘 만든 것이(스트레스-free 측면)
일본차지만 MX-5 이외엔 이젠 뭐 없잖아.
렉서스가 IS 250C 잠깐 만들다 말았으며
LC 500도 이제 단종 수순이고.
차량 가격이 비싸지면 비싸질수록
당연히(?) 고장도 덜 나고 완벽하길,
내 신경을 덜 건드려줬으면
하는 마음은 사실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독일차를 벗어나
더 비싸고 희귀한 이태리차, 영국차로 가면
고장 및 유지보수 스트레스의 융단 폭격.
독일차조차도 정비 비용 및
고장, 문제 발생이 부담스러우면
당신은 렉서스 이외엔 사면 안 됨.
제네시스도 아니고, 렉서스.
나같이 아무리 차가 나를 힘들게 하고
주머니에서 돈을 숨쉬듯이 빼가더라도
그래도 좋다. 마세라티. 이런 사람이나
영국차(F-타입) / 이태리차(페라리, 마세라티)
도전 가능하지 나머지한텐 절대 비추천.
나 요즘 모건에 꽂혔는데 정말...
극악의 유지 난이도를 향해 달려가는 중.
그래서 SL은 럭셔리함과 성가심 측면에서
딱 황금 밸런스를 맞춘 차량이라 봐야.
정말 끝장으로 호사스럽나 하면 그건 아니고
메르세데스-벤츠다운 꼼꼼함이 주요 매력.
그렇지만 일본차만큼 고장이 안 나거나
품질에 대한 믿음이 가는 건 아님.
어쩔 수 없는 게, 아무리 메르세데스-벤츠가
동급으로 묶이는 BMW보다 한 템포
신기술 투입을 고의적으로 늦게,
약간 분위기를 본 후 안정화를 거쳐
투입하는 편이어도 일본 브랜드보단
차량 제작 및 파워트레인 개발에
신기술 투입을 더 빨리 하기 때문.
한 줄로 정리한 SL은,
럭셔리카계의 골디락스 존.
SL은 위에 언급했듯 지붕이
소프트탑이 아닌 하드탑인데도
트렁크가 이렇게 크다. 놀랍다.
대신 탑을 열면 저 아래
캐리어가 들어있는 공간 이외에는
트렁크 공간이 없다고 봐야 하고
캐리어 수준의 큰 짐 넣어두면
탑을 다시 닫아야 꺼낼 수 있지만,
이정도만 해도 어디야.
28인치 캐리어 들어가는 컨버터블,
소프트탑이어도 거의 없다시피하다.
근데 하드탑 달고 이만큼? 미친거지.
캐리어를 감싸는 저 덮개는
지붕을 열기 위한 센서 같은 물건.
저 덮개를 걸쇠에다 걸어야지만
차가 '지붕을 열어도 되는구나,
짐과 걸려서 문제 생기지 않는구나'
자동으로 인식해서 지붕이 열리고,
걸쇠에 덮개 안 걸면 열리지 않음.
이걸 보면서 알 수 있는 게,
독일차는 탑승객의 편의 측면에서 승차감이나
다른 것 뿐만 아니라 수납공간도 신경씀.
컨버터블이지만 그로 인한 운용 시의
불편함을 최대한 줄이려고 정말 노력했다.
포르쉐도 그렇지만 메르세데스-벤츠는 더 해.
차를 평소에 타고다니려면
지갑이나 작은 잡동사니 정도는
둘 공간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안 그럼 정말 불편하거든.
독일차는 이런 2도어 차량도
꽤 수납공간을 둬서 편안하고
컵홀더 역시 마찬가지이다.
컵홀더 사이즈가 꽤나 큼직해서
큰 음료 꽂아도 전혀 문제 없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2도어 스포츠카들조차 어지간해선 독일차여서
(직장인의 마지노선이 포르쉐 911이니)
독일차의 은총에서 벗어나는 순간
얼마나 불편해지는지 쉽사리 경험하기
어려운 게 사실인데, 막상 가보면
영국차나 이태리차? 걔네들은
"야 지갑 하인 보고 좀 갖고오라그래"
이런 마인드로 차를 만들기에
정말 애로사항이 꽃핀다. 정말.
내 물건 어디다 두라는건가 싶을 정도로
수납 공간따위 신경 안 쓰는 차들 천지.
그래서 나같은 서민에겐
메르세데스-벤츠가 좋아.
잡동사니 갖다줄 하인이나 비서가 없으니.
벤츠 하면 편안함이 으레 연상되니
승차감부터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난 이 차가 SL인지라 아무리
레이싱 혈통에 2도어 컨버터블이어도
S-클래스 차급에 상응하는 모델이라
굉장히 편안하고 노면의 요철 등을
언제 있었냐는 듯 말끔히 먹어치우며
도로를 매끈하게 밀어버리는 차량일거라
타기 전에 예상하고 운전석에 올랐는데
의외로 차가 굉장히 진솔하다.
이 차는 에어매틱이 아닌 일반
코일 스프링과 전자제어식 댐퍼.
국내에 수입된 SL 400은 에어매틱이
기본으로 장착되어서 들어왔는데,
6세대 SL은 이미 판매된지 세월이 많이
지난 탓에 에어 서스펜션이 다들 터져서
코일 스프링으로 많이들 바꾸는 추세.
에어매틱 수리비 살벌한거야 뭐...
이 차에 관심이 있다면 다들 알 테니.
코일 스프링으로 바꾼 SL이
딱 이 차와 동일한 느낌일텐데,
에어매틱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일단 차고가 생각보다 낮아서
메르세데스-벤츠 승용차들보다 확연히
충격으로부터 탑승객이 가깝게 위치하고
서스펜션의 스트로크도 길지 않음.
그런 와중에 스프링은 깔끔하게 노면의 표면과
내가 현재 통과 중인 도로의 자잘한 디테일들을
차로 전달하고, 생각보다 단단한 댐퍼가
이를 부풀리거나 묻어버리지 않고
운전자에게 최종적으로 토스함.
이렇게만 들으면 SL이 평소에 타기
굉장히 불편한 차량일 것 같지만,
실제론 이런 충격들을 차가 머금지 않고
곧바로 해소시켜버리기 때문에
불쾌함이나 불편함이란 전혀 없다.
생각보다 통상적인 메르세데스-벤츠보다
포르쉐가 주는 댐퍼의 느낌에 가까움.
부싱류들도 SL에 와서는 유격을
살짝 줄여서 장착한 것 같은 느낌.
S-클래스는 이러면 안 되거든.
모든 턱과 패임을 집어삼켜야 하는 찬데.
SL은 생각보다 본인의 레이싱 혈통에 진심.
예전에 글을 썼던 718 박스터가
PASM 미 탑재 차량이었고 댐퍼가 살짝
돌쇠같은 질감을 주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6세대 SL도 분위기는 얼핏 비슷하나
그래도 메르세데스-벤츠라서 훨씬
(충격)강도를 다듬고 낮춰놓은 감각.
장거리 운행 시 부담이 되지 않도록
너무 막 바퀴가 요철에 부딪히는
과감함은 절제를 해놓았지만,
반대로 운전대를 잡고 신이 날 땐
운전자가 차량과 운전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솔직함.
포르쉐는 정말 스포츠카 회사니까
100의 진솔함을 선보이는 게 필수.
메르세데스-벤츠는 럭셔리카 회사이니
그보다 약간 낮춰서 80 정도?
잘나가는 비즈니스맨들이 탈 것 같은
그런 차량이니까. 사회생활 하려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보여주면 안 되잖아.
덜 솔직하다는 게 거짓말을 한단 게 아님.
내 예상을 뒤집어버린 이 SL 350,
타고다니면 다닐수록 더 만족스럽더라.
그동안 여러 메르세데스-벤츠 차종 시승기에서
내가 열심히 말했듯 에어매틱 탑재가
꼭 좋은 승차감을 보장하지 않는다 했는데,
이 SL이 딱 내 의견 그대로의 차량.
에어매틱이 빠져서 코일 스프링이 보여주는
진솔함과 철제 용수철의 유연함이 강점.
에어매틱은 공기주머니로 차를 받치기 때문에
무거운 차량일수록 일정 수준 이상
공기 주머니 내부의 밀도를 올려야 함.
S-클래스가 아닌 이상 나머지 하위 차종들은
생각보다 꽤나 스프링이 단단하거든?
에어매틱이 빠진 게 더 나은 경우가 많다.
아니, 더 낫다. 거의 다.
에어매틱 탑재된 CLS 450 4Matic과
에어매틱 미탑재인 CLS 300d 4Matic
이 두 차종의 안락함을 비교하면
미안한데 후자가 월등함.
돈 더 냈지만 승차감이 떨어진다니까.
심지어 추후 정비비용도 더 드네.
불편한 진실이지만, 진실.
CLS 450 4Matic은 단언컨대
고속주행 원툴 차량. 유일한 포인트.
고속도로에서 쫙 나아가는 데엔
정말 이만한 차가 없지만 대한민국의
각종 포트홀과 방지턱 세례에는
CLS 300d 4Matic이 훨씬 낫다.
비교가 불가하게 말이지.
그 다음 순서는 주행 성능.
미안한데 한 가지 알고 가야 할 게,
이 차는 지금 언더스티어를 왕창 유발하는
타이어와 얼라인먼트 조합 상태이다.
앞 타이어는 피렐리 신투라토 P7,
뒷 타이어는 피렐리 P Zero.
후륜의 접지력이 타이어빨로 더 높으면서
심지어 폭도 뒤는 285mm, 앞은 255mm라
타이어 폭 조차도 뒷 타이어가 훨씬 넓음.
그 말인 즉슨, 앞의 신발이 뒤의 것보다
훨씬 일찍 미끄러지기 시작함.
그런 상태인걸 알고 평을 하자면,
이 차는 딱 80%의 페이스까지.
한계에 접근하려고 그 선을 넘어보면
그때부터 차의 큰 덩치와 무게가
어디 숨어있다가 갑자기 등장하는데,
'이 차는 이런 용도의 차량이 아니네'
대번이 그런 생각이 들더라.
SL 350의 공차중량은 1685kg*
엄청 무거운 건 절대 아니지만,
또 엄청 가벼운 차도 전혀 아님.
그런 부피와 부피에 따른 중량감이
일정 수준 이상의 횡G를 걸면
즉각적으로 나타나서 안 돌려 함.
물론 이 차는 근본적으로
정말 순수한 스포츠성을 추구하는
스포츠카보단 럭셔리 컨버터블이고
심지어 뒤에 무거운 철제 지붕을
트렁크에 한가득 싣고 있는 차량이니
이 정도의 몰아붙일 수 있는 상한선은
그리 낮지 않다고 생각이 된다만,
그보다도 80%의 주행을 할 때의
그 교감과 독일차다운 직결감, 철컥거림은
생각보다 굉장히 만족스럽게 다가온다.
'벤츠 빨려고 뒤떨어지는 코너링을
이렇게 쉴드를 치고 자빠졌네'
할 수도 있겠는데, 다시 언급하지만
이 차는 퓨어 스포츠카가 아님.
현재 판매중인 7세대 SL은
4기통에 소프트탑이 조합된
SL 43의 공차중량이 1775kg로,
이보다도 더더욱 무거운 상황.
신형 SL 63 4Matic+는 나 타보았는데,
1950kg라는 무게가 너무나도 적나라해
AMG가 개발했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고성능 컨버터블이란 이미지와
전혀 맞지 않게 느리고 불편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 SL 350은
훨씬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적은 상황.
하드탑을 싣고도 공차중량이
저만큼이나 낮으니 당연하겠지만.
아, 정말 옛날이 좋았네.
이런 큰 차를 골라도 이런
너무 풍만하지 않은 무게에 끊고
운전자와 차량, 노면간의
적당한 교감을 즐기는 차가 나왔다니.
내 머릿 속의 메르세데스-벤츠란
이런 차량인데, 요즘은 뭔가 잘못됐다.
*공식 영국 카탈로그 기준
그리고 이 차의 몰랐던 장점 :
유압식 파워스티어링. 너무 좋아.
제원 정보를 모른 상태에서 탔는데,
타면서 '이거 유압식 아니야?' 했건만
아니나다를까 정답.
메르세데스-벤츠 측에서는
다이렉트 스티어 with EPS라 써놔서
얼핏 보면 전자식인가 싶겠지만,
전자식에서 본 바 없을 정도의
기름지고 그득한 피드백이 빼박이다.
근래의 차량들은 각종 모드로 떡칠해서
스포츠 모드에 가면 운전대가 무거워지고
별의별 걸 다 건드는 반면에, 이 차는
운전대 무게감과 피드백은 딱 한 가지다.
르반떼를 타면서 좋았던 점 중 하나가
주행 모드 설정값과 무관하게
운전대는 늘상 똑같은 태도를 보인단 거였는데
이 SL 350 역시 마찬가지. 안 바뀜.
전자제어식 서스펜션이 탑재되어
서스펜션은 컴포트 - 스포츠,
파워트레인은 에코 - 스포츠 - 매뉴얼
이렇게 조합을 바꿀 수가 있지만
운전대는 '딱 좋은' 설정 하나.
재규어로 대표되는 영국산 고급 컨버터블은
주행 특성을 바꿀 수 있는 하드웨어를
돈 받고 팔아먹은 다음에 한 술 더 떠
'설정 가능한 다이나믹스'라는
소프트웨어 조절 장치를 유료로 파는데
메르세데스-벤츠라 그런지 이런
사악한 상술 없이 잘 달아줬네.
유압식 파워스티어링끼리 비교하면,
재작년에 일본에서 타고다닌
구구형 박스터(987)도 유압식인데
그 차보단 확실히 노면에 대한 피드백이
미세하게 걸러져서 내 손에 전달된다만
역시나 이건 메르세데스-벤츠와 포르쉐
두 회사의 지향점 차이에 따른 것.
유압식 답게 중심부의 헐렁한 유격은
찾아볼 수 없으면서도 지나친 무게감 없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편안한 조향이 가능.
유압식 파워스티어링이라고 능사는
절대 아니거든. 차량 제조사의 역량에 달림.
예전에 초기형 모하비 몰 때
이게 유압식?? 하면서 미궁에 빠질만큼
흐리멍텅하고 지멋대로인 운전대에
놀랐던 바가 있는데, 그럴 만도.
현대기아차는 아직도, 아이오닉 5 N조차도
스티어링은 제대로 해결 못 했거든.
오늘날의 모하비 더 마스터는
차로 유지 보조 등의 ADAS 탑재 때문에
전자식 파워스티어링(R-MDPS)로 바뀜.
AMG가 손봤다는 7세대 SL,
SL 63 4Matic+의 운전대와 비교해선
이 SL 350의 스티어링 스타일이 뭐랄까,
'캐주얼하다? 정말 초 집중을 요하기보단
가벼운 마음으로 정확한 조작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신 SL은
중심부 무게가 좀 지나치게 느껴지거든.
'AMG가 손을 댔다는'걸 티내기 위해
무게감과 운전대로 전달하는 정보를
부풀렸다는 인상이 다소 있는데
얜 별다른 기교를 시도하지 않는 모습.
그리고 고속주행.
메르세데스-벤츠 최고 장기.
지구상 그 어떤 회사도 벤츠를
감히 고속도로에선 넘볼 수 없음.
SL은 지붕이 열리는 차량이라
속도를 높이면 높일 수록
실내에 유입되는 바람 양이 늘어서
탑을 연 상태에서는 낸 만큼의 속도가
바로 체감이 되지만 지붕을 닫는 순간
메르세데스-벤츠만의 마법이 시작된다.
너무나도 체감 속도가 낮은지라
금방 과속하게 되니 주의 필요.
SL 350으로 160km/h까지 속도를 내면
체감상으론 타 차량의 100km/h 수준?
120km/h로 느긋하게 가고 있으면
속도가 두 자릿 수에 멈춘 듯,
계기판이 고장났다 믿는 게 빠르리라.
그러니까 이 미친 회사는
100mph(160km/h)로 달려도
100km/h로 달리는 느낌을 주는 것.
단위를 마구잡이로 바꿔버리네.
그러니까 마법 맞지.
이런 믿기 힘든 고속 안정감 때문에
장거리 주행 스트레스는 극저.
그랜드 투어러, 고급 쿠페 / 컨버터블
본분에 더 없이 들어맞는 차량이다.
SL은 S-클래스보다 차고를 낮추고
살짝 단단하게 조여놓은 편이라
S-클래스의 '이미 몇 시간 운전했지만
방금 침대에서 자고 일어난 듯한
극강의 안락함'보다는 약간 덜한데,
메르세데스-벤츠다운 면모는
전혀 빠지지 않고 과시 중이다.
최근에 나온 E-클래스(W214)는
이 같은 전설적인 메르세데스-벤츠의
고속 안정감에 위해를 끼쳤는데,
제발 옛날로 돌아와.
ESP는 해제하더라도 개입함.
AMG GT가 아닌 이상
메르세데스-벤츠는 당신이 차량을 몰다
운명을 달리하도록 절대 놔두지 않음.
DSC OFF 하면 바로 꺼지는
BMW와는 설계 사상 자체가 달라.
난 운전을 잘 못하니까
차가 나를 벼랑으로 밀어넣지 않는
메르세데스-벤츠같은 차량이 좋아.
절대다수인 내 느긋한 운전 패턴에는.
메르세데스-벤츠 컨버터블의
특징 아직 안 끝났다. 아직도.
에어스카프라고, 목 뒤에다가 히터를 쏴줘
추운 겨울날에도 춥지 않게
오픈 에어링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거의 사기에 가까운 아이템.
에어스카프는 오랜 세월동안
메르세데스-벤츠가 독점하다시피 한 기술.
요새는 타 차량에도 일부 탑재되지만
이 SL 350이 출시되던 2013년엔
목에다가 히터 쏴주는 컨버터블은
메르세데스-벤츠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뚜껑이 열리는 컨버터블을
타고다녀본 적 없는 이들이 주로 하는
대표적인, 흔한 착각이 바로
"컨버터블은 여름에 타는 차."
실제로 타고다녀보면 알겠지만,
사실 컨버터블은 겨울에 타는 게 최고.
마치 아이스크림 먹기에 겨울이 좋은 것과
거의 같은 이유인데, 추위가 오히려
이걸 즐기는 데 도움을 준다니까.
한여름에 아이스크림 들고다니면
3초만에 녹아서 떨어지고 손 엉망되고
느긋하게 그 맛을 즐기기 어렵잖아.
컨버터블도 한여름에 탑 오픈하면
내리쬐는 햇볕에 정수리가 뜨겁다.
난 피부와 정수리를 불살라가면서 한여름,
심지어 사막에서도 지붕을 꼭 여는 사람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거 힘들어서 못해.
겨울은 목도리 딱 든든하게 하고 타면
생각보다 차량 실내론 바람 안 들이치면서
깨끗하고 청명한 겨울 공기 흡입 가능.
근데 메르세데스-벤츠를 탄다면
깜빡하고 목도리를 집에 놔두고 나와도
걱정 없이 타고다닐 수 있네?
메르세데스-벤츠를 소유하는 장점이
운전하면서 죽을 걱정이 없단 것 말고도
또 다른 걱정도 덜어준다는 것.
2016년에 벌어졌던 특허 소송에서
메르세데스-벤츠를 소유한 다임러 그룹이
패소하는 바람에 잠시 독일 내에서는
에어스카프 탑재가 불가능했었는데
그 특허는 2016년이 마지막 해였던지라
특허권이 만료돼서 다시 잘 탑재되는 중.
에어컨 바람을 쏘는 건 안 됨.
찬 바람이 목덜미에서 직빵으로 나오면
사람이 체감하는 체온과 외부 기온이
갑자기 확 떨어지기도 하거니와
소름이 돋기도 해서 안 만든 듯.
바람 얘기 한 김에 공조기 얘기도.
메르세데스-벤츠의 공조기는 참 신기함.
온도 변덕 없이 꾸준하고 차분하게
일관된 바람의 온도로 쭉 밀고 가는데
송풍되는 바람의 온도가 들쭉날쭉하면
탑승객이 느끼는 쾌적함의 정도가
생각보다 더 많이 떨어지거든.
메르세데스-벤츠 말고도 공조기에
신경 많이 쓰는 회사가 또 있는데,
놀랍게도 의외로 쉐보레다.
이런 것도 차량의 '기본기'라 칠 만 하지.
난 인터넷에서 쉐슬람들이
기본기의 쉐보레라 칭송하는 게
과연 동급 현대기아차와 제대로
주행 시의 모습을 비교해보고 하는 말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자주 있는데,
허구헌날 현대기아차 C-MDPS 욕하면서
쉐보레의 R-EPS가 좋다고 난리다만
막상 그거 적용된 차종들(특히 말리부)
타보면 운전대 중심부 유격 장난 아니거든.
오히려 쉐보레는 이런 기본기가 좋다고.
몇천만원씩 들여서 사는 또 다른
나의 생활 반경이자 공간이
쾌적해야 하는 거. 이것도 기본이지.
다만 좌핸들 차량 기준으로
공조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우핸들 SL 기준으로는
사용 빈도가 더 높은 버튼들이
운전자로부터 떨어져있음.
메르세데스-벤츠 정도면 이거 위치
바꿔서 달아줄 법도 한데 안 했더라고.
하기사 SL은 많이 팔리는 차가 아니니까.
이런것까지 전부 맞춰서 팔자니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거겠지.
그 외 메르세데스-벤츠가 좋은
사소한 듯 중요한 디테일들.
일단 와이퍼.
벤츠 와이퍼 시끄럽기로 유명한데
SL이라 그런지 소음 별로 없었음.
사실 메르세데스-벤츠는 와이퍼에도
이전부터 굉장히 공을 들이는 회사.
와이퍼에서 워셔액이 나오도록 해서
더 효과적으로 윈드실드를 닦던지
날 1개짜리, 상하로 움직이는
와이퍼를 도입해서 닦는 범위를 넓히던지
그동안 와이퍼를 갖고도 끊임없이
선진적인 시도를 많이 한 회사가 이 곳.
이번에 SL 350 타고다니면서
절반 이상의 시간동안 비가 왔는데
(일본이 이번에 장마가 2주 당겨졌다고)
와이퍼에 붙어있는 'CLEAR VIEW'답게
상시 선명한 시야를 제공해서 만족.
그리고 더없이 중요한 헤드라이트.
이 SL 350은 2013년 출시 차량이라
요즘 메르세데스-벤츠 차종에서 널리 쓰이는
멀티빔 LED 옵션이 등장하기 전인데도
하향등과 상향등 둘 다 품질이
이 당시의 차량이라고 믿기 어렵게 좋다.
너무 좋아서 밤에도 과장 좀 보태면
낮인 것 같은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함.
방금 말한 두 가지는 솔직히
사람들이 차를 살 때 고려하는 부분이
전혀 아니지만, 이런 부분들이 모여
'편안한 운전'이란 대주제를 만들고
이런 걸 끝없이 늘 추구하는 게
정말 지극히 메르세데스-벤츠.
이 회사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
메르세데스-벤츠는 타고 다니면서
인생의 일부분을 함께해보고
시간을 보내보면 그 가치를 또 한번
차주에게 전달한다는데, 정말 맞다.
한 가지 개인적으로 짚고 싶은 건
다름아닌 SL의 페인트 품질.
요새는 환경 보호라는 핑계로
수성 페인트를 쓰기 때문에
도장면이 이전같이 매끄럽긴 힘든데
이때 이 차만 해도 참... 감탄스럽다.
이 차는 솔리드 색상인 폴라 화이트가 아닌
국내에서도 돈 꽤나 받는 유료 옵션인
다이아몬드 화이트 브라이트가 칠해져있는데
햇빛 아래에서 보면 두툼한 펄감과
겨울에 온열기에다가 손을 갖다대는 듯한
따뜻하고 포근한 색온도가 특징이다.
이 색상의 무광 버전에 가까운 컬러도
인디비주얼 오더를 하면 고를 수 있다.
캐시미어 화이트 마그노라고,
개인적으로 내가 되게 좋아하는 색상.
고급차의 필수 덕목에
좋은 오디오가 빠질 수 없지.
이게 최신 아이폰 혹은 iOS와
구형 차량들의 iPod 연결 옵션이
뭔가 충돌이 나는 것 같더라.
저번에 구형 카이엔도 그러더니.
그 카이엔도 2011년식이고,
이 차도 2013년식이라 동시기 차량.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무선으로.
근데 무선이어도 음질 상당히 양호해서
솔직히 정말 깜짝 놀랐다. 이때 차량이라면
블루투스 코덱 수준도 뒤처지거니와
이 SL은 기본 오디오가 탑재돼있어서
볼륨 끝까지 올리면 찢어지고 난리나야
정상인데 웬걸, 부드럽게 잘만 표현함.
위로는 하만 카돈 로직7이 있고,
그리고 AMG 모델 전용인 뱅 앤 올룹슨도 있음.
나 맨날 차량용 하만 카돈 쓰레기라고 까는데
이때까지만해도 차량용 하이파이에
뱃지 인플레이션 바람이 불기 전이라
최고급 차량에도 붙는 딱지들이
겨우 BOSE나 하만 카돈 정도였음.
그러니까 이 시절 차는 하만 카돈이래도
무시할만한 품질이 절대 아닌 거.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 번 들어보고 싶네.
전반적인 오디오의 성향은
중음과 저음을 묵직하고 매끄럽게 밀어내고,
고음을 그에 비하면 살짝 약하게 내는데
생각보다 보컬 표현에 굉장히 충실하다.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보컬이
치고 빠질 때 그 빠지는 순간에
꿈에서 갑자기 깨어난 것 처럼
지속력이 부족하게 느껴지더라.
그런데 기본 오디오니까.
이걸로 트집 잡으면 양심이 없는거지.
역시 오디오도 차급이 깡패다.
SL 정도의 차급과 차값이 되니
딱지 없는 노브랜드(?) 시스템조차
적당히 만족할만한 소리를 들려줌.
장시간 들어도 부담이 없더라고.
렉서스 RX의 마크 레빈슨이 딱 그런데
또 걔보다는 SL의 기본 오디오가
약간 개성을 더 살린 느낌.
무던함을 한 스푼 덜어낸 느낌.
내 리뷰에 잘 등장하지 않는 연비.
특출난 무언가가 있지 않은 이상
언급 빈도가 낮은 항목인데
굳이 짚는 이유는 꽤나 좋아서.
산 타면서 차량 테스트하고,
일부 고속주행을 제외하고는
가다서다하는 국도 통과 및
도쿄 시내의 정체 위주로 다녔는데
최종 연비는 12.2km/l.
배기량이 3.5L라 그리 작지도 않고
차도 그렇게 가벼운 편이 아니며
7G-트로닉이라 요즘의 변속기들보단
기어비 갯수도 부족한데도
꽤나 인상적인 결과를 뽑아냈다.
SL 350은 원래 65L 탱크인데
이 차는 대용량 연료탱크 옵션이
포함된 차량이라 75L가 들어감.
차대번호 조회해서 알아냈고,
실제로 주유량을 봐도 그게 맞는 듯.
딱 4분의 1탱크 남은 상태에서
가득 넣으니 53.7L 들어갔거든.
이 차로 장거리 고속주행을 하며
먼 여행을 떠난다 생각하면,
고속주행만 쭉 이어갔을 때의
연비는 대략 14km/l까지 올라갈건데
합산하면 한 탱크로 무려 1050km.
그랜드 투어링 하기 최고의 차량이다.
자동차로 멀리 떠날 때 제일 성가신 게
주유를 자주 해줘야 하는 차량인데
M2 너 말야 너(탱크 52L)
SL 350은 정체 없이 쭉쭉 가면
한 탱크로 서울 - 부산 왕복하고도 남음.
엔트리 모델이라 V6라 빈약하다고?
이 차도 좀만 거칠게 악셀 밟으면
출발할 때 휠스핀이 꽤 나더라.
ESP ON 상태에선 걔가 잘라버리지만.
뒷 타이어는 P Zero라고 이미 말했지?
이 차는 SL씩이나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신 차량이 아니고 좀 지난 차량이라
요즘 차에서 보기 힘든 고급스러움이 있다.
메르세데스-벤츠란 원래 이런 차.
근데 요새는 루이비통처럼 온 사방에
삼각별 모양을 도배하고 있음.
아니 메르세데스-벤츠는 세 꼭지 별
하나만 달아도 누가 봐도 벤츠.
별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데
뭘 자꾸 그걸 도배를 하는지.
나 루이비통 LV로고 온 사방에 박은 거
정말정말 진심으로 혐오하는데
하필 내가 좋아하는 메르세데스-벤츠가
그걸 따라하고 있다니 미칠 노릇.
그러나 럭셔리카가 역대급으로 흔해진
오늘날에도 메르세데스-벤츠는
4천만원짜리부터 4억에 이르는 차량까지
전부 이 세 꼭지 별을 달고 팔 수 있는
전무후무한 전 세계 유일의 회사.
폭스바겐그룹은 이 가격 범위를
전부 커버하기 위해 수많은 뱃지들 -
스코다부터 폭스바겐, 아우디, 포르쉐,
람보르기니, 벤틀리까지 동원해야 하는데
메르세데스-벤츠는 그대로 쓰리 포인티드 스타.
마이바흐도 세 꼭지 별 뒤에 달잖아?
우루스에 VW 뱃지 붙는다 생각해보라.
딱지갈이한 투아렉인 진실이 탄로나기만 하지.
A220부터 마이바흐 S 680,
어느 하나 안 자랑스럽지 않은
메르세데스-벤츠 패밀리의 일원.
이럴 수 있는 건 극강의 브랜드 파워와
메르세데스-벤츠에 대한 사람들이 신뢰
'벤츠'하면 여전히 먹어주는 점
이 세 가지가 작용하고 있어서도 그렇고,
메르세데스-벤츠란 회사 자체가
대중 브랜드들만큼은 아니지만
굉장히 폭 넓은 차종들을 만들면서
일관되게 자신들의 신념과 아이덴티티를
똑같이 녹여 차를 만들기에 가능한 일.
이런 회사가 또 없어요.
허나 요즘의 신념은
'중국에다 많이 팔자'
짱깨들이 독일차를 망치고 있다.
중국이 연관되면 안 망가지는게
없다시피할 정도지만 독일차 전반이
중국 시장을 겨냥하기 시작한 이후로
날이 갈 수록 엉망이 되어가는 중.
하여튼 모자란 것들이 인구만 많답시고
멀쩡한 차를 완전히 망가트리고 있음.
천박한 졸부 중국인들 입맛에 맞춘다고
날이 갈 수록 모든 조작감과 주행감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있는데,
정말이지.. 요즘 독일차 참 그래.
메르세데스-벤츠만 망가진 게 아니고
BMW도 이미 완전 망가졌지.
실내에 앰비언트 라이트를 늘리는 게
작금의 유행이었는데, BMW 수뇌부는
그걸 차량 외관에다 쳐박으면
남들보다 앞서갈 수 있으리라 믿나 봄.
코평수 늘리기는 거의 끝장을 봤으니
거기다가 이제 조명을 심는거야. 천재인가.
사진이 70장이나 들어간 글은 처음.
사진 정리하고, 배치하고 글을 쓰고
SL 350을 다루는 이 글 하나를 완성하는 데
들어간 시간을 따지면 거의 24시간쯤 되네.
공을 들인 만큼, 이 차에 대한 내 애착과
하고싶었던 말이 많다는 걸 알아주시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망가져가는 세상과 독일차를 보며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견디는 중인데,
열 두살 먹은 SL 350을 만나니
그동안 그렇게 그리워했던
진짜 독일차와 조우한 기분이라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내가 좋아하는 메르세데스-벤츠'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시간도 가졌음.
아, 정말 메르세데스-벤츠 좋다.
큰 기대를 안 하고 만난 차량이라 그런지
더더욱 타는 내내 행복했음.
멀어져가고 있어서 속상했지만,
어디에 숨어있는지 아는 진주를
끝내 찾아서 껍데기를 오픈한 기분.
SL 350은 대신 지붕을 오픈.
메르세데스-벤츠 찬양하는 글
머지않아 하나 더 올라갈건데..
일단 다음 글은 또 다른 SL이 될 예정.
걔가 과연 삼각별을 믿는 나로 하여금
벤비어천가 시즌2를 부르게 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주세요.
근데 메르세데스-벤츠는 지켜볼수록
망해가고 있는데................................